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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정의 실천했더니 병원이 어려워지더라"

바람아님 2015. 6. 12. 09:43

중앙일보 2015-6-12

 

메르스가 우리 사회를 발가벗기고 있다. 부실한 국가 시스템은 말할 것도 없고 개별 직업군, 개개인의 윤리 수준까지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서울의료원 진료부장이 ‘메르스 확진자가 경유한 의료기관을 거친 환자는 받지 말라’는 e메일을 소속 의료진에게 보내 파문이 일고 있다. 서울의료원은 정부와 서울시가 지정한 메르스 진료 병원이다. 진료부장은 의료진을 지휘하는 선임 의사다. 서울시가 제시한 대로 지금이 ‘준(準)전시 상황’이라면, 진료부장은 일선 부대의 중대장 같은 존재다. 재난에 가까운 상황을 경험하고 있는 국민 입장에선 해당 진료부장은 전투를 거부한 군 장교처럼 느껴질 수 있다. 서울시가 서둘러 진료부장 보직을 박탈하고, 박원순 서울시장까지 나서 공개사과를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강인식</br>사회부문 기자

강인식/사회부문 기자

 

사건의 파장이 컸던 또 다른 이유는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우리의 기대가 너무나 쉽게 부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대학병원 의사는 기자에게 “이번 일을 겪으면서 돈이 안 되는 예방의학이나 방역 전문가를 택하는 의학도가 정말 없다는 걸 실감했다”고 했다. ‘그 무엇보다 환자의 생명을 첫째로 여기고 양심과 위엄으로 일하겠다’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더 이상 의사의 직업 정신을 대변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병원과 의사에 대한 일방적 매도는 정당하지 않다. 인하대병원 최선근 교수가 페이스북에 남긴 글을 많은 이가 공유하고 있다. “질병관리본부의 요청으로 몇몇 다른 병원이 거부한 50대 여성 메르스 감염자를 수용한 이후 매일 수백 명의 환자가 줄어들어 병원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병원의 선택이 잘못됐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환자와의 관계에는) 환자와 의사 이상의 그 무엇이 존재한다.”

 

 이 글을 몇 번이나 읽어봤다는 한 의사는 “모든 걸 누군가 제대로 복기(復棋)해야 한다”고 했다. “서울의료원의 시설은 대학병원에 비해 열악하고 방역이나 감염 분야 전문가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보급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는데, 전투 성과를 내라는 건 모순이죠. 진료부장을 옹호할 순 없지만 그런 선택을 하게 된 배경도 살펴봐야 합니다. 국가는 방역을 위해 무엇을 해왔습니까.”

 메르스 사태 이후 국내 최고 병원으로 불리는 서울대병원조차 외래 환자가 40% 이상 줄었다고 한다. 음압병실은 포화상태고 호흡기내과 의사는 24시간 2교대 근무를 하고 있다. 전선은 있지만 전선으로 가는 보급로는 끊겨 있는 셈이다. 아니, 한국엔 원래 그런 보급로가 없었던 게 아닐까. 최선근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의를 실천했던 우리 병원은 요즘 너무나 어렵다.”

 

글=강인식 사회부문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