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조선보다도 못한 21세기 전염병 대처법

바람아님 2015. 6. 21. 10:05

시사INLive 2015-6-20

 

메르스 공포가 한창이다. 공포의 가장 큰 원인은 '알 수 없어서'일 거야. 치료법도 예방법도 나와 있는 게 없고, 어떻게 전염되는지 얼마나 위험한지 어느 정도로 퍼졌는지 도통 알 수 없으니 무서운 거겠지. 그래도 우리는 메르스라는 바이러스의 존재와 그 모양이라도 알지. 당최 원인을 알 수 없으면서 사람들을 픽픽 쓰러뜨리던 옛날 전염병이란 아마 그 시절 사람들에게는 상어 떼 그득한 바다를 헤엄치는 공포와도 같았을 거야.

우리 역사에서 가장 파괴적인 전염병은 무엇이었을까. 언뜻 떠오르는 건 천연두야. 수천 년 인류 역사상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또 역사를 여러 번 바꾸기도 한 병이지. 우리나라에서는 '마마'라는 극존칭으로 불릴 만큼 공포의 대상이었고. 그런데 19세기 이 천연두를 무색하게 하는 신흥 강호(?)가 조선을 휩쓸어. 페스트? 아니야. 페스트는 역사상 최대급의 괴물이긴 하지만 한국 사람들에게는 조금 관대했던 듯싶어. 페스트가 집단 발병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니까. 문제의 젊고도 강력한 전염병의 이름은 콜레라였어.

콜레라는 세계를 휩쓸고 중국을 거쳐 1821년 조선에 들어왔어. 그해 9월의 <조선왕조실록>에 '이 병에 걸린 사람 열에 하나둘도 살아남지 못했다'라고 했으니 치사율 90%의 무서운 병마였지. 조선 인구를 1000만명으로 잡고 100만명 정도가 콜레라의 제물이 됐다고 보더구나. 그 뒤 콜레라는 몇 번의 유행을 거쳐 '호열자(虎列刺)'라는 이름을 획득하지. '호랑이가 찢어발기는 듯한 고통'이라는 뜻이니 이 병이 어느 정도의 공포였는지 알 수 있지 않겠니.

↑ ⓒWikimedia : 조선 최초의 '콜레라 대책위원장' 에비슨 선교사(맨 오른쪽)와 에비슨의 양아들 박서양(오른쪽에서 두 번째).

 

이전에 콜레라가 발생하면 정부가 하는 일이라고는 성 밖에 움막을 짓고 환자들을 데려다 놓고 병이 낫든가 죽든가를 기다리고 무당에게 굿을 시키거나 제사를 올리는 게 다였어. '유행하는 괴질이 아직 가라앉지 않아 사망자가 날마다 늘어난다고 하니, 놀랍고 송구함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이것이 이미 백성을 위한 일이라면 사례의 유무에 구애받지 말고… 산천(山川)의 양재제(禳災祭)를 정성껏 거행하도록 하라.'(순조 21년 8월)


19세기의 막바지, 그러니까 청일전쟁과 갑오농민전쟁이 온 조선을 혼란으로 몰아넣던 그 시기에 호열자, 콜레라는 또다시 발생했어. 이때 조선 정부는 콜레라를 상대한 이래 처음으로 근대적인 방역을 실시하게 돼. '예방법을 행치 않고 편안히 앉아 인민의 어려움을 돌아보지 않으면 정부의 책임을 잃는 일'이라고 공언했던 내무대신 유길준은 캐나다 출신의 선교사 에비슨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서울 일원의 콜레라 퇴치를 요청하지. 순검(경찰) 20여 명을 붙이고 명령에 따르지 않는 관리들에 대한 처벌권까지 줬다니 매우 파격적인 조치였던 셈이야.

에비슨은 서울에 와 있던 선교사들을 동원해 방역위원회를 만들고 방역 활동에 나서. 조선 사람들은 이때 에비슨이 장안에 써서 붙인 포고문을 보면서 호열자의 정체와 처음 마주하게 돼. '콜레라는 악귀에 의해서 발병되지 않습니다. 세균이라 불리는 아주 작은 생물에 의해서 발병됩니다. 만약 당신이 콜레라를 막으려면 균을 받아들이지 않아야 합니다. 지켜야 할 것은 음식은 반드시 끓이고, 끓인 음식은 다시 감염되기 전에 먹기만 하면 됩니다.'

↑ ⓒ연합뉴스 : 6월8일 메르스 점검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

조선 최초의 '콜레라 대책위원장' 에비슨은 신분 귀천에 개의치 않고 환자를 치료했고 그 와중에 목숨이 위태롭던 박성춘이라는 백정을 구하게 돼. 고종의 주치의였으며 후일 명성황후가 죽은 뒤에는 권총 들고 겁에 질린 고종을 지켰던 에비슨이 백정 마을로 뛰어들어 그들을 치료한 것은 큰 울림을 주었지. 이 일을 계기로 박성춘과 그 동료 백정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박성춘은 아들 봉출을 에비슨에게 맡겼어. 후일 박봉출은 박서양이라는 이름의 의사가 돼서 독립운동과 의료 활동을 함께하는 선각자가 되지.

또 에비슨은 자신에게 고마워하는 내무대신 유길준에게 탄원했어. '백정도 다른 이들처럼 갓을 쓰고 다닐 수 있게 해주시오.' 그 후 에비슨은 거리에서 멋들어진 갓을 쓰고 활보하는 한 남자를 보게 돼. 그건 '내 아들을 맡아주시오. 백정으로 살게 하긴 싫소!' 하며 두 손 모으던 백정 박성춘이었어. 에비슨은 환호한다. '내가 한국에 와 있는 이유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데 있지 않았던가.'

'고위직 친척'이 있어야 검사도 받는구나

그 후로도 콜레라는 간간이 발생해서 식민지 조선 사람을 괴롭히고 일제 당국을 긴장시켰어. 일본 경찰이 기차간에서 설사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바지를 내려보라고 하면 그대로 해야 했을 만큼 콜레라는 여전히 공포와 경계의 대상이었지. 그 후 또 한 번 콜레라가 대유행했는데 1946년 광복 후 첫봄이었어. 중국 동포들이 귀국선을 타고 부산에 상륙했는데 그중 한 청년이 구토와 설사를 거듭하다가 죽어버려. 콜레라였지. 콜레라는 무서운 기세로 확산됐고 특히 대구의 경우가 가장 심했다. 식량난이 심각해서 사람들이 쇠약했던 데다가 대구가 워낙 더운 지역이라 냉수나 냉차를 마시던 습관 때문이라고도 해.

문제를 키운 것은 병에 대한 지나친 공포와 방역 당국의 일방통행이었어. 환자가 나오면 무조건 격리시켰는데 감기몸살 환자나 영양실조로 누워 있는 사람들까지 끌고 갔고 이에 겁먹은 사람들은 가족이 병이 나도 벽장에 숨겼다가 나란히 콜레라에 걸려 죽어가기도 했으니까. 또 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통행금지를 실시했는데 이건 이곳저곳을 떠돌며 일하던 가난한 사람들한테는 굶어 죽으라는 명령과도 같았단다.

'병들어 죽으나 굶어 죽으나 마찬가지다! 식량을 다오!' 만성적인 식량난에 콜레라가 덮쳤던 1946년 봄과 여름은 마침내 10월1일 대구 봉기로 이어지게 돼. 좌익 세력의 개입도 있었다지만 핵심은 굶주림과 전염병에 시달린 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지. 당시 대구 근처 구미에서 인망 높았던 한 사람이 경찰과 봉기한 군중의 중재에 나섰다가 경찰의 총을 맞고 죽었다. 이름은 박상희. 박근혜 대통령의 친삼촌 되시는 분이야.

세균과 바이러스, 그리고 그들이 일으키는 전염병은 인류가 직립보행을 시작하던 시절부터 인류를 대량학살하기도 하고 또 인간에 의해 정복되기도 하면서 오랜 세월 함께 살아왔단다. 사람들은 전염병의 공포에 굴복하면서도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왔고 그 와중에 스스로를 바꾸면서 역사의 페이지를 고쳐 써왔어. 그런 뜻에서 오늘 우리의 메르스 사태를 돌아다본다.

무엇보다 메르스는 21세기를 지나는 대한민국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었어. 일선 병원에서 메르스 의심 환자의 바이러스 검사를 의뢰했을 때 질병관리본부는 검사를 거절했어. 환자가 '우리 친척 중에 고위직이 있다!'라고 윽박지른 다음에야 검사를 시행했다지. 선교사 에비슨이 보면 '조선 왕조 조정도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하고 혀를 찰 일이야.

정부는 메르스 발생이 2주나 지나서야 '긴급' 회의를 열었단다. 지난 주말에는 난데없이 '손 잘 씻으라'는 '긴급 재난' 문자 메시지가 날아들더구나. 정부는 무능하고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이고 환자와 병원은 죄인 아닌 죄인이 돼 머리를 숙이고 수천명이 '격리'를 요구받은 상황이 됐어. 콜레라가 창궐하던 1946년 대구에서 눈에 핏발 선 사람들을 달래려고 애쓰던 현 대통령의 큰아버지, 박상희 선생이 오늘의 모습을 보면 기가 막혀 하지 않을까. '이런 호열자만도 못한 일이 있나!'

김형민 (SBS CNBC 프로듀서) /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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