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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의 중국이 걷는 길 ⑤] 천안문 성루의 마오쩌둥…한쪽 귀만 그려 한쪽 말만 듣는다?

바람아님 2015. 12. 19. 01:37
[J플러스] 입력 2015.12.17 22:45

유상철 기자는 1994년부터 98년까지 홍콩특파원, 98년부터 2004년까지 베이징특파원을 역임했고, 2007년부터 2012년까지 5년 간 중국연구소 소장을 지낸 중국통입니다.

중국은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초강대국으로 성장했습니다. 앞으로 중국은 어떻게 변모해나갈까요. 그에 맞춰 우리는 또 어떻게 적응하고 도전해나가야 할까요.
유상철 기자의 '시진핑의 중국이 걷는 길'은 이같은 질문의 실마리를 찾기 위한
칼럼입니다.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시진핑의 중국이 걷는 길'을 업로드할 예정입니다.

시진핑(習近平) 시대의 비전인 중국꿈(中國夢)은 무얼 말하나. 후술하겠지만 중국꿈을 이해하기 위한 단초를 우리는 천안문 광장에서 찾을 수 있다. 한데 천안문 광장에 가면 꼭 만나게 되는 인물이 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또는 바람이 부나 1년 365일 한결같이 천안문 성루를 지키고 있는 마오쩌둥(毛澤東) 초상화가 주인공이다. 오늘은 이 마오 초상화에 얽힌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어떤 이는 마오의 초상화를 보고 사진을 크게 확대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이는 사진이 아니라 사람이 손으로 그린 초상화다. 유화(油畵)다. 30평방미터 크기의 이 대형 초상화는 신중국 건국에 맞춰 1949년 10월 1일 처음 등장했다.

마오 초상화 변천사[첫번째 사진 출처 노컷뉴스]


마오의 첫 초상화를 그린 화백은 당시 중앙미술학원에 재직하던 저우링자오(周令?)였다. 그가 그린 마오는 지금과는 딴판인 팔각모(八角帽)를 쓰고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마오 주석은 내게 정치가라기보다는 호쾌하고 풍류를 아는 문인(文人)으로서의 이미지가 더 컸다”는 게 저우 화백의 설명이다. 마오는 낭만적인 혁명가로서 당시 중국인들에게 어필하고 있었던 것이다. 건국 초기 혁명의 낭만이 넘치던 중국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듬해부터 국가의 틀이 잡히며 초상화 또한 정형화한 모습으로 바뀐다. 장전스(張振仕) 화백에 의해 단정하고 위엄이 있는 표준상이 정립됐다. 그러나 그 바통을 이어받아 1964년부터 76년까지 마오를 그렸던 왕궈둥(王國棟) 화백은 모진 고초를 겪었다.

문화대혁명의 광기(狂氣)를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홍위병이 몰려 와 몽둥이 찜질 세례를 퍼부었다. 초상화를 그릴 때 “마오 주석의 한쪽 귀만 그려 마오 주석이 한쪽 말만 들을 우려가 있다. 이는 화가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였다는 것이다.
왕 화백에 따르면 중국 당국이 애초에 정한 초상화의 표준상이란 한쪽 귀만 나오게 하는 측면상이지, 양쪽 귀가 다 나오는 정면상은 아니란 것이다. 그를 인터뷰했을 때 기관지염을 앓고 있으면서도 흥분해 목소리가 높아지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무튼 터무니 없는 이유로 왕 화백이 곤욕을 치른 이후 천안문 성루의 마오 초상화는 이제까지 모두 두 귀가 나오는 정면상으로 그려지고 있다. ‘혹시 누가 아나. 어느 날 갑자기 시대가 바뀌어 제2의 홍위병이 튀어 나올지’ 하는 걱정이 잠재돼 있는 것이다.

참고로 천안문 성루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하고 있는 마오 초상화는 1년 이상 버티기가 어려워 매년 10월 1일 중국 국경절에 맞춰 새로 그려진다. 매년 8월 말부터 작업에 들어가 9월 중순 전후해 일을 마친다.

초상화 완성엔 짧게는 2주, 길게는 한 달 정도 걸린다. 가로 5미터, 세로 6미터 크기로 근거리와 중거리, 또 원거리 모두에서 마오의 얼굴이 잘 드러나도록 그려야 하는 기술적인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


유상철 중앙일보 중국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