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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최고의 화력...해전술은 유럽보다 200년 앞서

바람아님 2016. 12. 19. 17:16

동아시아 최고의 화력...해전술은 유럽보다 200년 앞서


(주간조선 2014.08.22 박재광 건국대 박물관 학예실장)


영화 '명량'으로 본 조선 수군 함포의 위력


‘앞으로 돌진하면서 지자포·현자포 등 각종 총통을 어지러이 쏘아댔다. 마치 나가는 게 바람과 우뢰 같았다.…중략… 

우리 배들이 일제히 북을 치며 진격하면서 지자포·현자포 등을 쏘고, 또 화살을 빗발처럼 쏘니 

그 소리가 바다와 산을 뒤흔들었다.’(‘난중일기’ 1597년 9월 16일)


위의 내용은 1597년 9월 16일 조선 수군이 13척의 배로 133척에 달하는 일본군의 공격에 맞서 기적의 승리를 이끌어낸 

명량해전에 조선 수군이 대형 화포를 활용한 상황을 설명한 기록이다.


누가 보아도 패배가 확실한 전투, 누가 보아도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던 전투, 이순신 자신도 믿기 힘든 승리이기에 천행

(天幸·하늘이 내려준 행운)이라 말했던 것처럼 명량대첩은 기적의 승리라 할 수 있다. 

명량대첩의 승리 요인을 영화 ‘명량’처럼 이순신의 투혼과 탁월한 리더십으로만 설명하기에는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느낄 것이다. 이에 대해 지금까지 다양한 학설이 제시되었지만 쉽게 결론을 짓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임진왜란에서 한 번의 패배도 용납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선 수군의 막강한 전투력의 비밀을 파헤쳐 보자.


지난 2011년 명량대첩 축제 때 고증을 통해 만들어진 조선 수군의 판옥선. /진도군청

지난 2011년 명량대첩 축제 때 고증을 통해 만들어진 조선 수군의 판옥선. /진도군청


전쟁은 과학이지 신화가 아니다. 따라서 전쟁은 하드웨어적 전투력과 소프트웨어적인 전투력에 의해서 승패가 결정난다. 

즉 아군의 전투력이 적군보다 우위에 있을 때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것이다.


명량해전을 비롯한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 수군의 승리도 이러한 개념을 통해서 설명이 가능하다. 

당시 조선 수군의 전투력을 구성하는 요소로는 전함인 판옥선과 거북선 그리고 전함에 장착된 우수한 성능의 대형 화포가 있다.

이와 함께 수군 지휘관이었던 이순신의 뛰어난 전술 능력과 두려움에 떨던 병사들의 투지를 일깨운 리더십 역량이 있다. 

적선을 파괴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대형 화포와 대형 화포로 무장한 ‘판옥선’의 전투력이 하드웨어적 전투력이라 한다면, 

이순신 장군의 ‘전술 능력’과 ‘리더십’은 소프트웨어적 전투력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조선 수군의 연승은 대형 화포와 판옥선으로 대변되는 조선 수군의 하드웨어적 전투력과 위대한 수군의 리더였던 

이순신에 의해 조성된 소프트웨어적 전투력의 융합을 통해서 강력한 전투력을 형성하여 일궈낸 결과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수군이 화포를 이용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이다. 

1377년(우왕 3년) 10월 최무선은 빈번하게 침범해 오는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 화약병기 제조기관인 화통도감의 설치를 

건의했고, 이를 통해서 대장군(大將軍)·이장군(二將軍)·삼장군(三將軍)·육화석포(六花石砲) 등 18종의 화약병기를 제조하였다.

이를 장착하여 전술적 효과를 높일 수 있는 전함도 건조하였다. 화약병기로 무장한 고려의 전함은 왜구와의 전쟁에서 

그 위력을 발휘하였는데, 대표적인 전투가 진포해전(鎭浦海戰)과 관음포해전(觀音浦海戰)이다.


1380년(우왕 6년) 8월 고려 수군은 전라도 진포에 침입하여 주둔한 왜선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는데 

이때 대규모의 화포 공격을 통해서 적선 500척을 모두 불태웠다.진포해전은 우리나라의 해전사에서 의미가 크다. 

먼저 자체 생산한 화약과 화포로 장비한 수군이 치른 최초의 해전이었다는 점이 하나이고, 

또 하나는 세계 해전술상에 있어서 화포가 장비된 전함이 투입되어 함포 공격을 감행한 최초의 전투라는 점이다. 

즉 기존의 해전에 있어서 기본 전술이라 할 수 있는 충파전술(衝破戰術)보다 한 차원 높은 화포를 이용한 당파전술이 

가미되어 해전술의 새로운 변화를 도모했다. 

이런 점에서 진포해전은 세계 해전술의 발전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는 진포해전에서의 승리를 바탕으로 왜구와의 전쟁에서 자신감을 되찾았으며 이를 토대로 해상 방어를 적극화하였다. 

이후 1383년 남해의 관음포해전을 통해서도 고려 수군의 전함과 화포의 위력은 여실히 드러났다. 

이 해전에서 정지(鄭地)는 화포와 궁시를 이용하여 해상에서 이동 중이던 왜선을 공격하여 17척을 불살랐다.


이렇듯 최무선이 개발한 화약무기는 해전에 활용되어 탁월한 성능을 발휘할 수 있었고 

이는 세계 해전술의 흐름을 바꿨다고 할 수 있다. 

유럽에서 화포를 사용하여 해전을 벌인 것은 고려보다 무려 200년이나 늦은 1571년 베네치아·제노바·에스파냐의 

신성동맹(神聖同盟) 함대가 오스만투르크 함대를 격파한 레판토해전(Battle of Lepanto)에서였다. 

당시 양쪽 세력은 비슷했지만 200척을 넘는 갤리선과 약 3만명의 병력을 거느린 오스만투르크 함대 측이 수적으로 

다소 우세했다. 

그러나 오스만투르크 함대는 신성동맹(神聖同盟) 함대에 신형 화약병기, 즉 대포가 탑재되어 있는 것을 알지 못했다. 

강력한 대포를 장비한 신형 베네치아 갤리선에서 예상치 못한 포격을 받고 오스만투르크 함대는 전열이 흐트러져 

패배했던 것이다. 신성동맹 함대는 100여척의 군함을 나포하고 1만명의 병사를 생포하는 등의 전과를 거두었다. 

이후 세계 해전술의 흐름은 화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고려 말에 급속도로 발전하던 화약병기는 1392년 조선이 건국된 이후 일시 정체되기도 했으나 부국강병책의 일환으로 

새롭게 인식되면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특히 세종은 지상전투에서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화약병기의 개발에 

노력하였는데 이는 평안도와 함경도에서 상습적인 침입을 반복하는 여진을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휴대용 화기와 더불어 박격포와 같은 성능을 지닌 대형 화포, 그리고 조기에 경보를 전달할 수 있는 신호용 화기 등이 

필요했고, 이에 화약의 성능을 개량하고 화기 제조기술을 향상시켰다. 화약무기가 전국적으로 보급되어 중앙뿐만 아니라 

각 도에서도 화포를 제작하였지만 성능 면에 있어서는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이후 세종이 직접 나서 이들 화포를 개량하고 표준화·규격화하는 작업에 착수하였고, 

1448년(세종 30년) 9월에 ‘총통등록(銃筒謄錄)’ 발간으로 이 작업이 마무리되었다. 

‘총통등록’은 이미 있는 총통들에 대한 전면적인 시험을 진행하고 성능이 좋지 못한 것을 개량하기 위한 

일련의 연구를 통해서 그 결과를 종합하여 전문화·규격화하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화약병기 발달사에 있어서 

의미가 크다. 당시 조선의 화기 제조기술은 동아시아 최고 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개량된 화포는 이후 1515년(중종 10년) 삼포왜란, 1528년 야인(野人)의 만포진 침범, 1544년 사량진왜변 등 

야인과 왜구들의 침구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한편 왜구들도 점차 새로운 조선술을 익혀 견고한 배를 만들고 

화기로 무장하게 되어 대형 화포의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특히 1555년(명종 10년)에 을묘왜변이 발생함에 따라 

왜선을 격파하는 데 효과적인 천자총통·지자총통과 같은 대형 화포의 제조가 이루어졌다.


이렇듯 지속적으로 개량된 대형 화포는 조선 최대의 전란이었던 임진왜란에서 조선 수군의 전투력 증강에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된다. 당시 조선은 천자총통·지자총통 등 다양한 화포를 보유하고 있었고 이를 함선에 모두 장착하여 

화포를 이용한 당파전술을 전개함으로써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당시 일본 수군은 중소형선과 조총을 중심으로 하여 배의 현(舷)을 붙이고 등선육박전술(登船肉薄戰術)을 펼친 반면 

조선 수군은 대형 선박의 전후좌우에 장착된 각종 화포로 당파전술을 펼쳤다. 

또 조선 수군의 대형 화포는 일본군의 조총에 비해 사거리가 월등히 길었기 때문에 조총의 사격권 밖에서도 

적을 공격할 수 있었다. 이 덕분에 육전과는 달리 절대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이들 화포에서 발사되는 대장군전·장군전·차대전 등 대형 화살(箭)은 적선의 선체를 위력적으로 파괴하였고 

필요에 따라서는 다량의 조란탄(鳥卵彈)을 발사하여 산탄 효과를 거두었다.


조선 수군의 대형 화포가 더욱 위력을 발휘하게 된 데는 전함도 한몫을 하였다. 당시 조선의 전함은 판옥선(板屋船)이다. 

판옥선(板屋船)은 1555년(명종 10년)에 일본군의 주된 공격전술인 등선육박전술(登船肉薄戰術)을 무력화하기 위해 제작된 

혁신적 전함으로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해양 방위에 종사했던 조선의 관료들이 꾸준히 지혜를 모아 만든 

‘꿈의 전함’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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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옥선은 구조적으로 일본 전함보다 선체가 크고 높아 적이 전함으로 기어오르는 것이 어렵게 설계됐다. 

내부는 3층 구조로 2층 갑판에는 노를 젓는 격군을 배치하여 적의 조총이나 화살 공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었으며, 

3층 갑판에는 전투원들을 배치하여 화포와 궁시를 이용하여 적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거기다 판옥선은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平底船)이기 때문에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우리나라 해안에서 자유로운 선회와 

안정적 운용이 가능하였다. 대형 화포 발사 시에 발생하는 폭발 반동력에도 견딜 수 있어 화포전에 유리한 구조였다.


불가능에 가까운 위기 상황에서 조선 수군은 판옥선에 장착된 대형 화포를 이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화력 집중은 구체적인 전투 현장에서의 우위를 점하는 방법의 하나이다. 

같은 병력과 무기체계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전투 현장에서 어떻게 운용되느냐에 따라 전투력은 극대화되기도 

하고 극소화되기도 한다. 이순신은 탁월한 전술 능력으로 임진왜란의 주요 해전에서 항상 적의 지휘선이나 주력함을 

식별하여 화력을 집중시킴으로써 공격 효과를 극대화했다.


이는 명량해전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난중일기’의 기록을 보면 대규모의 일본 함선이 명량을 통과하여 조선의 전함들을 에워싸 여러 장수들이 절대적 열세 상황에 

낙심하여 쉽게 대응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순신은 선두로 돌진하며 지자·현자총통 등의 화포를 이용한 집중 사격을 가해 

적의 접근을 저지했다. 

물론 영화에서는 이순신이 홀로 돌진하여 적진에서 힘겹게 백병전을 벌이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사실과 다르다.


또 거제현령 안위가 적의 장수가 탄 배와 그 휘하의 함선 2척에 의해 포위 공격을 당하자 자신의 전함으로 안위의 전함을 

공격하는 일본 함선 후미에 화포 공격을 가하였다. 이후 인근에 있던 녹도만호 송여종과 평산포대장 정응두와 합세하여 

집중적으로 화포 공격을 가하여 일본 함선 3척을 순식간에 격파시켰다. 

격파된 3척 가운데에 일본 장수 마다시(馬多時)의 전함이 있었는데 조선 수군의 공격으로 배는 격파되고 마다시 또한 

전사하여 시신이 바다에 떠올랐다. 

이순신은 일본 장수 마다시의 시신을 끌어올려 목을 잘라 효시(梟示)하여 적의 사기를 꺾어 놓았다.

그러자 조선 수군의 사기는 크게 진작되어 일제히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면서 총공격을 감행하여 순식간에 일본 함선 

30여척을 격파하였다. 대형 화포를 이용한 적선에 대한 화력 집중이 명량해전 승리의 또 하나의 요소였던 것이다.


특히 전투가 벌어졌던 명량은 폭이 좁고 낮아 물살이 빠르다. 

가장 좁은 목이 약 330m, 수심이 가장 얕은 곳이 1.9m, 가장 빠른 유속이 약 6㎧에 달한다. 

또 바닷물의 깊이가 평균 2m 안팎에 불과하고 바다 밑에는 크고 작은 암초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때문에 조류 현상으로 바닷물의 흐름이 바뀌면 명량 근처의 좁은 물길로 엄청난 양의 바닷물이 흘러들게 되고, 

명량 근처에서 빠른 흐름을 만든 바닷물은 다시 바위에 부딪쳐 큰 소용돌이를 만들게 된다. 

또 명량의 조류는 세계에서도 1, 2위를 다툴 만큼 물의 흐름이 빠르다고 한다. 

특히 명량해전이 일어난 9월 16일은 만조와 간조의 차이가 크고 조류도 매우 강했다.


이런 지형과 조류 상황에서는 배의 조종과 운용이 쉽지 않아 전투 행위를 하기에도 다소 무리가 있다. 

특히 일본 수군이 널리 활용했던 등선육박전술(登船肉薄戰術)을 구사하기에는 더욱 힘든 지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 판옥선의 견고한 선체와, 바닥이 평평한 형태의 구조는 이곳에서 더욱 진가를 발휘하였다. 

빠른 물살과 지형 여건으로 인해 접근전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판옥선은 비교적 안정적인 운용이 가능했고, 

또한 장착된 대형 화포를 이용하여 원거리에서 적선에 화력을 집중하였기 때문에 순식간에 적함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명량해전 당시 일본 수군도 함선에 화포를 설치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임란 당시에 

어떠한 해전에서도 조선의 판옥선이 격파되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대형 화약무기를 적극적으로 

운용하지는 못했다고 본다.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의 한마디 한마디는 관객의 눈과 귀를 붙잡고 가슴을 울리게 한다. 

이순신이 선조에게 올린 장계에 쓴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와 병사들에게 

“적이 비록 1000척이라 하더라도 우리 배들을 대적하지 못할 것이니 일절 동요하지 말고 힘을 다해 적을 쏘거라”라고 

한 말에는 판옥선과 대형 화포에 대한 이순신의 무한의 믿음을 담겨 있다. 

문제는 패전의 두려움을 병사들이 극복하고 얼마나 싸워줄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이순신은 전투를 앞두고 극심한 공포와 불안에 떨고 있는 조선 수군들에게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라고 외치며 자신이 먼저 적진으로 나가서 싸웠다. 

그의 솔선수범하는 모습에 함께 싸우다 죽기를 결심한 장수들은 그를 따라나섰고, 전쟁은 결국 승리로 끝났다. 

두려움을 투지로 바꿔 기적을 이루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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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광 건국대 박물관 학예실장


건국대 사학과, 성균관대 대학원 박사. 

조선시대 전쟁과 전술, 무기 등 연구. 전쟁기념관 학예연구관·교육팀장, 국가보훈처 현충시설 심의위원,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문위원 등 역임. 

저서 ‘충무공 이순신’, ‘화염조선-전통무기의 과학적 재발견’,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임진왜란과 한일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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