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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일언] 굴뚝 있는 원룸

바람아님 2017. 1. 18. 23:28
조선일보 : 2017.01.18 03:04

홍형진 소설가
홍형진 소설가
고향 집 앞에는 20m짜리 높다란 굴뚝이 우뚝 서 있다. 어린 시절, 동네마다 한둘씩 있던 목욕탕 굴뚝이다. 베란다에서 바라보니 군데군데 부식되고 페인트칠이 벗겨진 모양새가 방치된 지 꽤 된 듯했다. 저 목욕탕 아직도 영업하느냐고 아버지께 물었다. 아버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동네 애물단지라고 말했다.

천재지변에 무방비로 노출돼 위험한 데다 동네 미관까지 해쳐 인근 주민의 불만이 상당하지만 철거 기미는 없단다. 철거 비용이 무려 3000만 원인데 현행법상 굴뚝 소유주가 전액 부담해야 한다고 했다. 소유주로서는 철거해봐야 돈만 잔뜩 들일 뿐 딱히 얻는 건 없고, 지자체 역시 개인 소유물 철거를 강요할 수 없어 마냥 방치된 상태다.

굴뚝은 그냥 둔 채 건물만 달랑 리모델링했는데, 그렇게 새로 거듭난 건물이 원룸이었다. 이거 참 묘하다. 돌이켜보면 과거의 목욕탕은 작은 사교장이었다. 아버지가 음료수를 미끼로 꼬드긴 아들과 벌거벗고 어울리며 성장을 확인했고, 집 근처에서 첨벙대고픈 불알친구 몇이서 냉탕을 휘저었다. 졸지에 유치원생으로 강등된 채 외할머니 손에 이끌려 들어간 여탕에서 같은 반 여자애를 만나 질겁하기도 했다.

[일사일언] 굴뚝 있는 원룸
그 목욕탕이 이젠 원룸이 됐다. 여기저기의 원룸에서 10년 넘게 사는 동안 사교라고 부를 만한 건 체험하지 못했다. 유난히 시끄러울 때 항의를 위해 서로 오간 게 전부였고 이웃 얼굴조차 모른 채 이사한 적이 다반사였다. 거기엔 그곳을 탈출하길 꿈꾸는 젊은이만이 가득했다.

여전히 거대한 굴뚝을 달고 있지만 속은 원룸으로 변해버린 옛 목욕탕. 그 풍경이 자아내는 기묘한 이율배반에 괜스레 아련한 기분이 들어 폭삭 삭은 굴뚝을 한참이나 쳐다봤다. 시간이 흐른 지금의 난, 원룸 탈출에 성공한 빌라 소유자다. 하지만 여전히 이웃의 얼굴을 모른다. 아파트로 업그레이드하면 달라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