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敎養·提言.思考

<살며 생각하며>봄 이기는 겨울은 없다

바람아님 2017. 1. 20. 23:32

문화일보 2017.01.20 12:54

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

더우면 더위가 되고 추우면 추위가 되라 한다. 말이 그렇지 아무리 겨울다워 좋다고 되뇌어 봐도 뼛속으로 파고드는 매서운 찬기에 쩔쩔맨다. 하여 뭇 생명이 살을 에는 아린 혹한에 갖은 힘을 다해 끈질기게 버틴다. 깡그리 얼어 죽을 것 같은데도 좀처럼 죽지 않고 참고 견디는 것이 참으로 신통방통하다. 한마디로 검질기고 독한 삶이라 하겠다.


그런데 송곳 추위를 무릅쓰고 보란 듯이 기세등등하게 설쳐대는 짐승들이 있으니 체온이 일정한 정온동물(온혈동물)인 날짐승(조류)과 길짐승(포유류)들이다. 이들 금수(禽獸)를 뺀 나머지 변온동물(냉혈동물)은 기온이 내려가면 체온도 따라 곤두박질친다. 따라서 심장박동과 호흡까지 뚝 떨어지므로 따뜻한 곳에 숨어들어 겨울잠(동면·冬眠)을 잔다. 주위를 휘둘러 살펴보라. 날짐승인 참새, 까막까치와 길짐승인 길고양이, 고라니, 노루 들을 빼고는 눈에 뵈는 것이 없지 않은가. 원래 동면이란, 기온이 내려가면서 체온도 함께 떨어져서 얼고, 녹기를 겨우내 되풀이하는 것을 이른다.


겨울나기(월동·越冬)란 동물뿐만 아니라 풀이나 나무들도 죽살이치는 일이다. 그러나 고추바람 부는 엄청 시린 엄동설한이 있기에 봄의 따사로움을 느끼듯 쫄쫄 배곯는 애옥한 삶을 살아보지 않고 어찌 배부름의 고마움을 알겠는가. 사람이나 나무도 모질게 시달리면서 더욱더 억세고 질겨지는 법이다.


초본, 목본 식물의 겨우살이를 먼저 본다. 풀은 추위에 영 약한지라 겨울엔 죄 죽지만 대신 쉽사리 얼지 않게 물기 하나 없는 마른 씨앗을 남긴다. 또 더덕도라지는 잎줄기가 쇠락해버리고 여린 싹을 머리에 인 채 억센 뿌리를 땅속에 깊숙이 박았고, 냉이나 민들레는 비록 핼쑥해진 잎사귀의 연둣빛이 바래서 푸르뎅뎅해지면서 땅바닥에 납작납작 포개 엎드려 태양열을 한껏 받아 근근이 겨울철을 앙버틴다.


그러나 나무는 좀 다르다. 소나무를 본보기로 알아보자. 기품 서린 의젓하고 듬직한 노송(老松)도 매섭게 차가운 끔찍한 겨울 냉기에 잎사귀가 꽁꽁 얼어 쇠바늘처럼 빳빳이 굳는다. 청송백설(靑松白雪)이라고, 무거운 눈가루를 잔뜩 뒤집어써 허리가 휘청거리는 판에 바람까지 뒤흔들어대니 죽을 맛이다. 수욕정이풍부지(樹欲情而風不止)하고 자욕양이친부대(子欲養而親不待)라! 나무는 고요해지고자 하나 바람이 기다리지 않고, 자식은 봉양하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꼭 그렇지만 않다. 솔밭에 켜켜이 쌓인 갈잎솔가리가 추위막이가 되어 주니 발이 덜 시리고, 밑둥치는 두툼한 용 비늘(용린·龍鱗) 나무껍질이 더덕더덕 붙어서 배길 만하나 우듬지의 가녀린 잎사귀들이 송곳 바람에 한기를 탄다.

그리고 나무들도 오는 추위를 미리 짐작하고 겨울을 대비한다. 늦가을에 접어들면서 일찌감치 세포조직에 양분을 비축하여 내한(耐寒)을 준비하니 담금질이다. 미처 담금질이 일어나기도 전에 갑자기 강추위가 오는 날에는 숲이 동해(凍害)를 입는다. 


이에 대비해 나무들은 세포에 프롤린이나 베타인 따위의 아미노산과 포도당, 수크로오스 같은 당분을 잔뜩 만들어서 얼음알갱이가 생기는 것을 막는다. 이런 것들이 바로 항(抗)결빙 물질로 부동액인 셈이다. 이런 부동액 덕에 솔잎 세포에 여간해서 얼음 결정이 생기지 않고, 생기더라도 세포와 세포 사이의 틈새(세포간극)에만 얼 뿐이다. 또 이렇게 틈에 박힌 얼음이 잇달아 세포 속의 물을 빨아내므로 세포 안 농도가 점점 짙어져서 어는점(빙점)이 낮아진다. 이 때문에 이렇게 보통 세포가 얼지 않게 되는 것이 곧 저온에 대한 순응인 것.


식물의 겨울나기는 이 정도로 하고, 청개구리를 일례로 동물들의 동면을 챙겨본다. 매운바람이 불면 물개구리는 냇물에 들고, 참개구리는 땅굴에서 떼 지어 고된 세한을 보내는데, 바보(?) 청개구리는 안타깝게도 홑이불에 지나지 않는 얼음장 같은 가랑잎 더미 속에서 혹독한 겨울과 처절하게 겨룬다. 탱탱 언 ‘냉동 청개구리’는 송장이나 다름없이 일각이 여삼추로 봄철을 기다리며 생명만 근근 부지한다. 또, 연녹색 살갗은 빛바래어 거무죽죽해지고, 야들야들했던 몸뚱이도 빳빳하게 돌덩이처럼 굳어서 건드려 봐도 꿈쩍 않는다. 눈물겹고 가련한 청개구리는 오직 심장 어름에만 간신히 피가 돌고, 몸의 65% 가까이 얼어 버렸다.


그런데 몸이 영하로 내려가면 물질대사가 거의 멈추기에 몸에 저장한 양분 소모가 퍽 줄어서 겨우나마 살아남을 수 있다. 목숨을 지탱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에너지(기초대사량) 이하로 대사를 왕창 낮춰 양분 손실을 크게 줄이려는 것이 겨울잠을 자는 까닭이다. 이른바 정자은행에서 액체질소에 영하 196도로 정자를 냉동하기에 오래오래 간직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원리다. 또한, 청개구리들도 가을에 벌레사냥을 잔뜩 하여 지방 글리세롤·당알코올인 소르비톨·특수 당단백질로 된 부동액을 온몸에 그득 갈무리해 놓았다. 동태가 된 청개구리가 겨우내 이들을 태워 열을 내기에 심장이나마 겨우겨우 살아 뛸 수 있다. 푸나무나 변온동물들이 안간힘을 다해 그 모질고 섬뜩한 겨울 한기를 어렵사리 이겨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신비로운 부동액 때문임을 어렴풋이나마 알았다.


아무렴 겨울이 깊으면 깊을수록 봄도 머지않다. 소나무가 푸름을 되찾고, 아울러 청개구리들도 펄떡펄떡 뛰놀 화사한 봄날은 분명 오고야 말 터이다. 정녕코 봄을 이기는 겨울 없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