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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사랑하며-김서정] 멍청한 아침

바람아님 2017. 2. 2. 23:32
국민일보 2017.02.02 17:26

며칠 전 밤 11시 큰이모부의 부음이 날아왔다. 나는 부랴부랴 광주행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어찌된 영문인지 내 머릿속 시계도 생체 시계도 고장이 났다. 비행기 시간을 착각한 건지 현재 시간을 착각한 건지, 하여간 출발시간 30분 전까지도 느긋하게 집에서 꾸물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불현듯 정신이 든 나는, 으아악! 빛의 속도로 비행기표를 취소하고, 기차 시간을 검색하고, 택시를 불러 타고 달렸지만 노렸던 KTX를 5분 상관에 놓치고 말았다. 다음 기차는 새마을. 예약했던 비행기로 가는 시간보다 무려 4시간 정도가 더 잡아먹힌다. 비용도 택시비 때문에 더 들었다.


이런 멍청이!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치밀어 오르는 분통으로 어쩔 줄 모르며 기차에 올랐다. 하지만 출발 5분쯤 지나 느긋하게 꾸물거리는 기차의 창밖으로 고색창연한 영등포 문화원이 눈에 띄는 순간, 어찌된 영문인지 그 분통이 스르르 녹아들었다. KTX로 쌩 하니 지나칠 때는 보이지 않던 풍경이 정답게 다가왔다. 안양. 산자락 아래 제법 큰 병원이 보인다. 평촌 살 때 저기서 건강검진을 받았지. 의왕. 산본 살 때 저 호수에 몇 번 왔는데. 그때는 없던 레일바이크며 공원이며 조류 박물관이 산뜻하게 들어서 있다. 산본에 계속 살 걸 그랬나?


그렇게 마음이 풀리니 소음에도 너그러워진다. 뒷자리 아주머니의 휴대전화가 연성 울린다. 지금 수원 지났다, 천안 지났다. 아니다, 뭐 하러 나오냐, 짐도 없응게 그냥 버스 타고 들어갈란다. 아주머니 아이들이 착하구나, 식구들 정이 많구나. 건너편 창가 할아버지는 참 컬러풀하시다. 빨간 점퍼에 초록색 신발, 베이지색 모자. 휴대전화는 시간마다 외친다. 열두 시! 한 시! 할아버지는 그 소리에도 까딱 않고 주무신다. 모자 아래로 삐져나온 은발이 창밖으로 지나가는 들판에 쌓인 눈처럼 하얗다. 그보다 더 반짝이는 것 같다. 역에 도착하니 햇살이 눈부시다. 큰이모부도 기쁜 마음으로 하늘로 올라가실 것 같다. 멍청한 아침이 선물 같았던 하루였다.


글=김서정(동화작가·평론가), 삽화=공희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