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5.10.28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99> 내각제를 포기하다
정치를 하면서 결단과 선택을 요구받는 대상들은 부분이냐 전체냐, 이상 이냐 현실이냐, 당이냐 국가냐 하는 것이다. 가장 좋은 선택은 이 대상들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환경을 미리 조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두 가지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이럴 때 정치인으로 지켜야 할 규범은 자기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정치를 허업(虛業)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실업(實業)하는 사람들은 욕망과 이기심을 바탕으로 선택을 하지만 허업 하는 사람은 사(私)를 버리고 공(公)을 취해야 한다. 정치의 과실은 정치인 자신이 아니라 국민에게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게 정치인이 정치를 하는 이유이고, 국민이 그들을 믿고 따르는 이유다. 나는 DJP공동정부의 국무총리를 2년 가까이 하면서 절벽에 선 듯한 고비에 다다랐을 때마다 부분보다는 전체, 이상보다는 현실, 당보다는 국가를 선택하려 했다.
새 정부는 출발부터 거대 야당인 한나라당에 발목을 잡혔다. 그들은 내가 공동정부의 총리가 되는 것을 집요하게 반대했다. 1998년 2월 25일 대통령 취임식 날부터 국회 본회의에 상정된 ‘총리임명동의안’ 투표에 집단으로 불참하더니 닷새 뒤 표결에선 백지·공개투표 방식으로 나를 압박했다. 결국 김대중 대통령은 퇴장하는 김영삼 정부의 고건 총리를 통해 장관임명 제청을 받아 내각을 구성했다.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나는 총리가 아닌 ‘총리 서리’ 임명장을 받았다. 여야가 똘똘 뭉쳐도 헤쳐나가기 힘든 격랑의 국가부도 위기에서 한나라당은 숫자의 힘으로 아예 정부 구성 자체를 막아 버리려 했다. 한 번도 정권을 놓아본 적이 없는 과거 여당의 집단 탈선이었다. 초가를 태워서라도 빈대는 잡아야겠다는 몽니일까. 그들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상황을 초래해 나라를 경제식민지로 만든 사태에 대한 반성과 자각은 없이 보수세력인 내가 김대중을 도왔기에 정권을 잃었다는 상실감에만 빠져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국회는 나의 총리임명동의안을 167일이 지난 8월 17일에 통과시켰다. 나는 그동안 주변의 걱정에 “총리 서리(署理)의 서리는 찬 서리(霜)와 같아서 햇살이 비치면 저절로 없어진다”고 농담으로 받아넘기곤 했다. 이튿날 DJ는 나의 국회 인준을 반기며 청와대에서 총리 임명장을 줬다. “임명장을 두 번 주시니 저는 재임(再任)한 겁니다”라는 나의 말에 대통령은 크게 웃었다.
내가 정식 총리가 된 뒤 정가와 언론은 내각제 개헌에 관한 대통령과 나 사이의 갈등과 충돌 가능성에 주목했다. 야당이 나와 DJ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의도가 역력했다. 대선 전에 합의서명한 ‘DJP후보단일화 협약문’에 따르면 “공동정부에서 내각제 개헌은 대통령이 발의하여 99년 말까지 완료한다. 개헌 이후 내각제 총리는 자민련이 맡는다”고 되어 있다. 한나라당뿐 아니라 제1집권세력인 국민회의에서조차 “어떻게 해서 얻은 정권인데 DJ가 2년 만에 대통령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오는 개헌을 하겠느냐”는 거부감과 의문을 제기했다.
공동정권은 두 개의 정당이 하나의 정부를 운영해 나가는 한국 정치의 첫 실험이었다. 해외 채권국들은 공동정부의 개혁 역량을 냉정하게 따지고 있었다. 거리에 넘쳐나는 실업은 목불인견(目不忍見)이었다. 대통령과 내가 국민에게 허리띠를 졸라매자고 호소하기 위해선 한 치의 간극도 없어야 했다. 나와 대통령은 서로 믿고 신뢰해야 했다. 나는 기자들의 의문에 이렇게 답했다.
“경제난 타개를 위해 현 시점에서 내각제를 거론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때가 되면 약속은 지켜질 것이다. 국민이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애쓰고 있으므로 그 의지를 훼손하는 얘기는 당분간 삼가는 게 좋다.”
DJ와 나는 공동정부를 내각제적으로 운영해 나갔다. 내각제적 국정운영에서 가장 필요한 건 대통령과 총리 사이의 긴밀한 대화다. 후보단일화 협약문에 따라 공동정부의 각료 배분을 5대5로 나누기로 했는데 국가운영의 경험이 있는 자민련이 경제 분야의 장관을 맡는 게 좋겠다는 결론은 DJP대화를 통해 도출된 것이다. DJ는 내가 일본· 중국 등지를 출장 갈 때 대통령 전용기를 내주기도 했고 부처 업무보고 때 나를 동반하려고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물론 내각제적 국정운영을 가능케 하는 기반은 제2집권세력(자민련)의 힘이다. 자민련이 대통령의 당선에 결정적 도움을 줬고, 국민회의(99년 103석)와 합쳐 정부를 지탱할 수 있는 국회 내 의석(55석)을 확보하고 있었기에 대통령과 제1집권당의 존중을 받았던 것이다.
공동정부 2년차인 99년 7월 나는 ‘올해 안 개헌’에서 멀어져 가는 여러 상황으로 인해 엄청난 중압감에 시달렸다. 우리 당의 김용환 수석부총재를 비롯한 충청권 의원들은 연초부터 단일화 협약문에 명시된 ‘99년 말까지 내각제 완료’의 이행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통상 개헌을 위해선 5~6개월의 시한이 소요되는 만큼 가(可)든 부(否)든 김대중 대통령과 결론을 내야 했다. 97년 DJP협약문은 DJ가 빠져나가기 불가능할 정도로 촘촘하게 내각제 추진의 일정과 방법을 적시해 놓았다. 개헌은 대통령 발의→국회 표결→국민투표의 3단계를 거치도록 했다. 김 대통령은 7~8월 중 의원내각제 개헌 발의를 해야 할 입장에 몰렸다. 그렇지 않으면 거짓말에 약속 위반, 자민련 공동정부 철수 등 모든 정치적 책임을 떠안아야 할 지경이었다. 국민회의와 자민련 지도부는 일찌감치 내각제 개헌의 장래와 운명을 나와 DJ 두 사람에게 위임해 놓았다.
이때쯤 김 대통령은 내 눈치를 보는 일이 잦아졌다. DJ는 주례회동에서 내각제 문제를 중심 의제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IMF 외환위기는 후보단일화를 합의할 때 생각지 못한 돌발 변수였다” “지금 경제개혁에 성공하느냐 마느냐에 죽느냐 사느냐가 달려 있다” “핵무기를 발사하려는 북한을 화해의 자세로 유도하는 데 국민 총력의 결집이 필요하다”고 심각하게 얘기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각제 개헌을 유보하자는 우회적인 표현이었다. 나는 내각제에 관한 한 약속 이행을 촉구해야 할 당사자이지만 국난을 헤쳐 나가는 문제에선 DJ와 한 배를 탄 국정의 공동책임자였다. 그의 말에 과장과 축소는 없었다. 무엇보다 DJ가 개헌을 발의할 경우 국회에서 3분의 2의 찬성이 나와야 하는데, 절반에 가까운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한나라당이 동조해 줄 리 만무했다. 국민회의 내부에서 김대중의 임기 중단을 의미하는 내각제 개헌을 할 수 없다는 주장이 나온 지는 오래됐다. 국민 여론조사에서도 내각제보다 현행 대통령제를 선호하는 비율이 높은 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개헌을 추진하면 국론 분열과 국력 소모, 국가 목표의 분산으로 나라가 다시 위험에 빠질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였다. 나는 ‘사무사(思無邪)’를 떠올렸다. 일에 당하여 간사함을 생각하지 않는다, 개인의 욕심에 끌려가지 않는다는 시경(詩經)의 가르침이다. 자민련 지도자만의 길을 걸을 것이냐, 국가운영을 책임진 자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 기로에서 나는 후자를 택하기로 결심했다.
99년 7월 17일 제헌절 저녁. 김대중 대통령의 초청으로 서울 광나루 워커힐 동쪽 끝 빌라에서 부부 만찬을 했다. 대통령은 2박3일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대통령과 늘 만나던 청와대가 아닌 곳의 특별한 초대여서 ‘올 것이 왔다’고 짐작했다. 식사가 끝난 뒤 대통령과 나는 따로 대좌했다. 김 대통령은 미안하고 주저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이 되어서 여러 가지 검토한 결과 내각제를 하기 어려운 실정이라는 판단을 하게 됐습니다. 약속을 못 지킬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한참 침묵을 지켰다. 그런 뒤 “무엇이 그리 어려우십니까”라고 묻자 그는 “정치인과 국민의 의식이 내각제를 하기에는 큰 괴리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다시 “내각제 추진은 대통령께서 국회에서 주도적으로 발의하도록 돼 있습니다. 국회 발의라도 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요구했다. DJ는 “국회 처리가 안 될 줄 뻔히 알면서 어떻게 발의를 하겠습니까. 국민을 두 번 속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막상 이 자리에 앉아 보니 안 되겠습니다”고 했다.
이제 나는 단안을 내려야 했다. ‘내가 모르는 정상(頂上)의 고뇌가 있을 수 있겠구나. 거기 올라가 보니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느끼는 모양이구나. 세상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매일 보고받고 소화하는 사람이 대통령인데…. 저 판단을 내가 따라야 하지 않겠나’. 나는 “대통령님의 말씀을 이해했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제 다음 장으로 넘어갑시다”고 결론을 내렸다.
내각제 추진을 포기하는 건 자민련의 정치적 치명상을 의미했다. 적어도 충청도에 지역구를 둔 자민련 의원들에게 내각제는 소위 ‘JP 대망론’을 상징하는 용어였다. 내가 내각제하에서 실제 권력을 행사하는 총리가 된다는 기대가 있어야 자민련이 선거에서 생존할 수 있다는 논리를 충청권 의원들은 갖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내각제 양보는 정치적 생명과 직결되는 중대사였다. 내각제 유보 소식이 전해지자 김용환 수석부총재를 비롯한 몇몇 의원들은 ‘JP가 DJ에게 속았다’는 등의 비난과 탄식을 쏟아내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결국 김 수석은 2000년 초 자민련을 탈당했다. 나도 공동정부 총리직을 떠나 당으로 복귀했다. 그해 4월 총선에서 자민련의 위세는 크게 꺾였다. 55석이었던 자민련은 17석으로 추락했다. 의석의 감소는 예상했지만 막상 교섭단체 구성도 어려운 형편에 놓이게 되자 허탈함이 없을 수 없었다. 그러나 99년 그때 상황에 내가 다시 돌아간다 해도 나는 내각제 유보를 선택할 것이다. 당보다는 국가, 이상보다는 현실, 부분보다는 전체를 중시하는 게 정치인의 길이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