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정치라는 게 지나면 남가일몽” JP “정치는 허업이란 말 다시 되뇌었다” … “대지 품었다가 기회 놓쳤는데 어떤가” JP, 이 총재에게 묻고 싶었지만 …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104> JP와 이회창
자민련 16대 총선서 교섭단체 실패
JP, 이회창 만나 “요건 완화해 달라”
이 총재 측 “그런 얘기는 한 적 없다”
JP “하나님, 누가 거짓말했는지 안다”
2000년 4월 총선에서 나의 자민련은 17석으로 줄어드는 참패를 당했다. 나는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내게 말해줬던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마음을 추스르려고 했다. “호랑이는 평소엔 먹이를 주고 목욕시켜주는 사육사를 따르다가도 조금만 밟히기라도 하면 사육사를 물고 덤빈다”는 트루먼의 정치 경험과 교훈을 내가 잊은 것이다. 총선 패배는 유권자들이 자민련에 정신을 차리라고 매를 때린 것인 만큼 나는 겸허히 받아들이려 했다.
정치를 하다 보면 여러 기복(起伏)과 시련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숫자가 적다고 할 일을 못하느냐”는 각오로 재기를 모색했다. 하지만 국회 원내 교섭단체(정족수 20석) 미달 상태에서 당의 입지가 옹색해지면서 내부의 동요와 외부의 유혹은 끊이지 않았다. 그때 야당인 제1당 한나라당, 제2당인 집권 민주당 모두 과반수에 미달했다. 나는 그 속에서 생존 공간을 마련해야 했고 소속 의원들에게 우리 당이 가야 할 길은 ‘실사구시(實事求是)’라고 강조했다. 이를 두고 한나라당에선 노욕(老慾)이니 줄타기 정치니 하는 비아냥과 비판을 했지만 나는 그대로 주저앉을 순 없었다. 자민련의 위상을 교섭단체로 바꾸려면 국회법 개정이 필요했지만 이회창 총재의 한나라당은 우리를 외면하고 무시했다. 그러던 이 총재로부터 나를 만나고 싶다는 뜻밖의 연락이 왔다. 그 만남은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권유 때문으로 기억한다. YS는 “한나라당은 자민련을 교섭단체로 만들어주고 JP와 손을 잡아야 한다”는 조언을 하고 있었다. 2000년 7월 22일 낮 경기도 용인의 은화삼 컨트리클럽에서 나는 이 총재를 만났다. 멀쩡하던 날씨가 폭우가 쏟아져 골프는 접어두고 클럽하우스로 들어갔다. 나와 이 총재는 7~8분쯤 따로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이 총재에게 “원내 교섭단체 요건을 17명으로 고쳐줄 수 없습니까. 일본은 3명만 돼도 교섭단체로 인정합니다”고 부탁했다. 이 총재는 “제가 혼자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당의 의사를 모아 검토하겠습니다”고 응답했다. 나와 이 총재는 웃으며 손까지 마주 잡았다. 오랫동안 이 총재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회동 내용을 공개했다. 하지만 이 총재는 교섭단체 이야기를 나눈 것 자체를 묵살하고 부인했다. 그는 대변인을 통해 “단둘이 앉은 시간은 30초 불과하며 그런 이야기는 없었다.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나는 “아무리 부정해도 하나님은 누가 거짓말을 했는지 아신다”는 말로 반박했다. 이는 가톨릭 신자인 이 총재가 들으라고 한 것이다. 이 총재로서는 97년 대통령선거에서 DJP 공조로 인해 분패한 쓰라림이 흉중(胸中)에 남아 있었겠지만 그런 응수는 상식에 벗어나고 터무니없었다.
2001년 1월 나는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부부 동반 만찬을 하면서 DJP 공조 재가동에 합의했다. 하지만 복원 과정의 곡절만큼 파란이 일었다. 그해 8월 평양에서 열린 8·15 민족통일대축전 행사가 그 계기였다. 남측 대표단 일부가 김일성 생가에서 보인 ‘만경대 정신을 이어받자’는 행태에 대다수 국민은 분노와 충격에 빠졌다. 그 행사를 주관한 통일부의 임동원 장관에 대해 한나라당은 국무위원 해임안을 제출했다.
나는 임 장관의 행태를 유심히 살펴왔는데 그가 국정원장이던 2000년 6·15 정상회담 때의 한 장면이 나의 뇌리에 남아 있었다. 평양에서 그는 북한 김정일과 술잔을 부딪치고 귓속말까지 하며 희희낙락하는 모습이었다. 그가 6·15 회담에 어떤 역할을 했든 간에 그 모습은 최고정보기관 수장의 자격을 잃은 치명적인 처신이었다.
나는 김 대통령에게 “임 장관을 왜 데리고 있습니까. 계속 옆에 데리고 있으면 부작용만 커집니다”며 임 장관의 자진사퇴를 유도했다. 하지만 DJ는 “아니, 그 사람 잘하고 있습니다. 사퇴시킬 이유는 없습니다”고 거부했다. 임 장관 건은 자진사퇴가 아닌 국회 해임건의안 통과로 정리됐다. 이는 자민련과 한나라당의 표결 공조에 따른 것으로 그 결과 DJP 공조는 와해됐다. 자민련으로 이적했던 의원 4명은 민주당으로 복귀했다. 김 대통령의 평소 신중한 자세로 미뤄 볼 때 무슨 이유로 임 장관을 고집스럽게 보호했는지에 대해 나는 지금도 의구심을 갖고 있다. 이를 계기로 정국 판도는 바뀌었다. 9월 18일 나는 신라호텔에서 이 총재와 조찬 회동을 하고 양당 간 정책 공조를 약속했다. 이를 놓고 JP와 이회창의 보수연합이 등장할 것인가에 정가의 관심이 쏠렸다. 하지만 이 총재는 ‘3김 정치 청산’과 ‘JP와의 제휴’라는 두 가지를 놓고 이것저것 저울질만 한 채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11월 1일 나는 이 후보의 부친 이홍규옹의 삼성서울병원 빈소를 찾았다. 나의 위로에 이 후보는 “감사합니다”라고 했을 뿐 특별한 말은 나누지 않았다. 장례식을 끝낸 이 후보는 조문을 했던 주요 인사들을 찾아다니며 답례를 했지만 나에겐 전화만 걸어왔을 뿐이었다. 그의 그런 행동은 실망스럽고, 3김 청산 구호에 묶인 좁은 생각이라는 상념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한나라당은 나를 고사(枯死)시키려 했다. 자민련 의원들을 계속 빼 가는 방식으로 나의 충청권 영향력을 뭉개고 위축시키려 했다. 나는 그때 격한 심정을 토로했다. 나는 “군함이 침몰할 때 함장은 군함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는 법이며 나 혼자라도 당을 지킬 것”이라는 고독한 결의를 다졌다.
선거 막판 여론조사에서 이 후보는 노무현 후보에게 뒤지고 있었다. 한나라당 일각에선 지금이라도 JP를 붙잡아야 승리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하지만 나에게서 떠나간 어떤 의원은 “이 후보가 JP를 찾아간다면 내가 못 가도록 차 앞에 드러눕겠다”는 극언까지 했다고 한다. 대선을 나흘 앞둔 12월 15일 나는 “급진세력도 대통령이 될 수 없지만 한나라당도 자격이 없다”며 중립선언을 했다. 그 직전 자민련에 입당한 이인제 총재권한대행이 이 후보를 지지한 데 대해 나는 “당의(黨意)에 저촉될 수 있으니 유념해 달라”고 제동을 걸었다. 나의 중립선언은 음으로 노 후보에 대한 지지로 비치기도 했다. 이 후보는 노 후보에게 패했다. 노 후보와 이 후보의 표 차이는 57만(2.3%포인트)이었다.
대선 이후 그 미세한 결과를 놓고 한나라당 의원들로부터 소탐대실(小貪大失)의 회한과 아쉬움을 토로하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이 후보가 JP와 단합했다면 승리했을 것이라고 분석한 사람도 많았다. 97년 대선에서 DJ가 나의 손을 잡으면서 충청도 표가 몰린 덕분에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판세와 비교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후보가 자신의 대쪽 이미지를 지키려는 소리(小利)에 집착해 보수 결속의 대의(大義)를 그르쳤다고 탄식하고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소이부답(笑而不答)으로 응대했다. 역사 진행에서 어떤 가정(假定)을 하는 일은 의미 없는 일이며, 세상사에는 인과(因果)라는 묘한 것이 있기 마련이다. 노 후보의 대통령 당선은 그의 성취이고 우리 역사 전개의 일부이며 국가의 운명이기도 했다.
올 2월 아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이회창씨가 문상을 왔다. 오랜만의 만남이었으며 우리는 건강을 화제로 잠시 덕담을 나눴다. 나는 그에게 “대지(大志)를 품었다가 이루지 못하고 기회를 놓쳤는데 어떻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 말은 꺼내지 않았다.
조문을 마친 이회창 총재는 심경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정치라는 게 지나면 다 남가일몽(南柯一夢·헛된 꿈)”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가 선택한 ‘남가일몽’이란 단어는 무엇인가. 나는 ‘정치는 허업(虛業)’이라는 말을 되뇌었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chun.yongggi@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