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2015-12-24
‘황국사관과 고려말 왜구’ 책 펴낸 이영 교수
“고려 말 왜구는 일본 남북조시대 남조의 정규 군사집단입니다. 하지만 ‘황국사관’에 입각한 일본 사학계는 이를 드러내지 않으려 하고 있어요.”
왜구에 관한 논문 9편을 묶어 ‘황국사관과 고려 말 왜구’라는 책을 최근 펴낸 이영 한국방송통신대 일본학과 교수(56)를 23일 만났다. 이 교수는 20년 넘게 왜구를 연구하고 있다.
고교 한국사 교과서는 ‘고려 말 왜구의 침임이 극심했다’ 정도만 서술할 뿐 왜구가 왜 생겼는지는 다루지 않는다. 일본의 대마도나 해안 지역민들이 식량 부족으로 노략질하러 나섰다는 게 왜구에 대한 통상의 인식이다. 그러나 이 교수는 “왜구의 활동 변화가 일본 남조 고다이고 천황에 충성했던 규슈 지역의 군사 정세 변화와 일치하는 것을 볼 때 왜구는 남조의 무사들”이라고 말했다.
1376년 11, 12월 왜구가 부산 경남 일대를 노략질한다. 이 교수는 이를 일본 남조가 북조와의 결전을 앞두고 급히 군량미를 확보하려는 목적이었다고 본다. 이듬해인 1377년 2월에는 충남 당진과 인천 강화도까지 왜구가 나타난다. 이는 1377년 1월 17일 남조가 북조와의 전투에서 패한 뒤 다음 전투에 대비해 고려의 물자가 모이는 개경 근처까지 침입해온 것이라는 분석이다. 또 남조의 본거지를 북조가 점령한 시기(1381년)와, 왜구의 침입 빈도와 규모가 격감한 시기(1383년)가 비슷한 것도 왜구가 남조 무사라는 방증이 된다.
이 교수는 “1376년 고려 사신이 무로마치 막부(북조)의 장군으로부터 받은 편지에는 ‘(막부) 조정에서 장수를 보내 군사 작전을 하고 있으니 규슈가 통치되면 해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돼 있다”며 “이 역시 왜구가 남조의 무사 집단이라는 명백한 사료”라고 말했다.
그러나 일본 사학계는 대체로 왜구가 변방의 ‘해민(海民)’이고, 심지어 화척(백정)이나 제주도민 등 고려인이 왜구의 일부였다고 주장한다. 대표적인 학자가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했던 나카무라 히데다카(1902∼1984)다. 이 교수는 “이 같은 주장은 고려 조정이 무능하고 부패해 왜구의 실체가 자국민이라는 것도 파악을 못했다는 논리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이 주장의 뿌리가 일본 천황은 역사적으로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다는 메이지 유신 세력의 ‘황국사관’이라고 말했다. 에도 막부를 무너뜨린 메이지 유신 세력은 1333년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킨 남조의 고다이고 천황과 그를 도운 구스노키 마사시게를 자신들의 역할 모델로 봤다. 그런 남조의 무사들이 바다 건너 노략질을 하러 다닌 왜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미국 학계에도 왜구에 고려인과 중국인이 많았다는 주장이 사실처럼 알려져 있다”며 “왜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명과 조선의 건국, 일본 북조의 승리 등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변한 14세기 후반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황국사관과 고려 말 왜구’를 최근 낸 이영 한국방송통신대 교수는 “천황의 잘못을 감추려는 황국사관 탓에 일본 학계는 왜구가 천황에 충성한 무사 집단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있다”고 말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왜구에 관한 논문 9편을 묶어 ‘황국사관과 고려 말 왜구’라는 책을 최근 펴낸 이영 한국방송통신대 일본학과 교수(56)를 23일 만났다. 이 교수는 20년 넘게 왜구를 연구하고 있다.
고교 한국사 교과서는 ‘고려 말 왜구의 침임이 극심했다’ 정도만 서술할 뿐 왜구가 왜 생겼는지는 다루지 않는다. 일본의 대마도나 해안 지역민들이 식량 부족으로 노략질하러 나섰다는 게 왜구에 대한 통상의 인식이다. 그러나 이 교수는 “왜구의 활동 변화가 일본 남조 고다이고 천황에 충성했던 규슈 지역의 군사 정세 변화와 일치하는 것을 볼 때 왜구는 남조의 무사들”이라고 말했다.
1376년 11, 12월 왜구가 부산 경남 일대를 노략질한다. 이 교수는 이를 일본 남조가 북조와의 결전을 앞두고 급히 군량미를 확보하려는 목적이었다고 본다. 이듬해인 1377년 2월에는 충남 당진과 인천 강화도까지 왜구가 나타난다. 이는 1377년 1월 17일 남조가 북조와의 전투에서 패한 뒤 다음 전투에 대비해 고려의 물자가 모이는 개경 근처까지 침입해온 것이라는 분석이다. 또 남조의 본거지를 북조가 점령한 시기(1381년)와, 왜구의 침입 빈도와 규모가 격감한 시기(1383년)가 비슷한 것도 왜구가 남조 무사라는 방증이 된다.
이 교수는 “1376년 고려 사신이 무로마치 막부(북조)의 장군으로부터 받은 편지에는 ‘(막부) 조정에서 장수를 보내 군사 작전을 하고 있으니 규슈가 통치되면 해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돼 있다”며 “이 역시 왜구가 남조의 무사 집단이라는 명백한 사료”라고 말했다.
그러나 일본 사학계는 대체로 왜구가 변방의 ‘해민(海民)’이고, 심지어 화척(백정)이나 제주도민 등 고려인이 왜구의 일부였다고 주장한다. 대표적인 학자가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했던 나카무라 히데다카(1902∼1984)다. 이 교수는 “이 같은 주장은 고려 조정이 무능하고 부패해 왜구의 실체가 자국민이라는 것도 파악을 못했다는 논리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이 주장의 뿌리가 일본 천황은 역사적으로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다는 메이지 유신 세력의 ‘황국사관’이라고 말했다. 에도 막부를 무너뜨린 메이지 유신 세력은 1333년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킨 남조의 고다이고 천황과 그를 도운 구스노키 마사시게를 자신들의 역할 모델로 봤다. 그런 남조의 무사들이 바다 건너 노략질을 하러 다닌 왜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미국 학계에도 왜구에 고려인과 중국인이 많았다는 주장이 사실처럼 알려져 있다”며 “왜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명과 조선의 건국, 일본 북조의 승리 등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변한 14세기 후반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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