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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인사이드]카스트 제도는 왜 아직 인도를 흔드는가

바람아님 2016. 2. 29. 00:20
세계일보 2016.02.27. 23:13

인도의 오랜 신분제도인 카스트(caste)가 민낯을 드러냈다. 지난 14∼23일 인도 수도 뉴델리 인근에서 ‘카스트 시위’가 벌어져 최소 28명이 숨진 것이다. 이번 시위는 달리트(불가촉천민)와 수드라(육체노동자) 등 하층민 고용·교육 우대 정책에 대한 바이샤(농·공·상인)의 집단 반발 성격이 짙다.

글로벌 시대 정보기술(IT) 강국 인도는 왜 아직도 이 같은 악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까. 그리고 이번 시위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영국 BBC방송과 AFP통신 등 주요 외신을 통해 최근 일단락된 인도 북부 하리아나주 카스트 시위의 배경 및 의미를 짚어봤다.
인도 북부 하리아나주 카스트 시위 장면. 출처: 일간 트리뷴인디아
인도 카스트 제도의 4대 계급. 힌두교 창조의 신인 브라마가 브라만-크샤트리아-바이샤-수드라를 창조했다고 전해진다. 출처: 영국 BBC방송

◆3000년 역사의 카스트 제도
인도 카스트는 약 3000년 전 힌두교인들을 저마다의 경제·사회적 역할을 구분짓기 위해 생겨났다. 고대 인도 마누 법전에는 카스트가 “(힌두) 사회의 질서와 규칙의 근간”이라고 적혀 있다고 BBC는 전했다.

카스트는 크게 브라만과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로 구성된다. 힌두교 창조의 신인 브라마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브라만 계급은 주로 승려나 교사 등 지식인들을 일컫는다. 크샤트리아는 브라마 팔에서 나와 정치나 안보, 치안을 담당하는 계급이다. 브라마 허벅지에서 나온 바이샤는 농업·무역·상업 등을, 발에서 창조된 수드라는 나머지 허드렛일을 맡도록 운명지어졌다.


◆인도인의 삶과 정체성 규정
인도 카스트가  4계급으로만 나뉜 건 아니다. 혈통·지역·직업에 따라 3000개 카스트로 나뉜 뒤 다시 하위 2만5000개 계급으로 구성된다. 각 카스트는 저마다 다른 성을 갖고 있으며 주어진 일만을 담당한다. 다른 카스트와의 결혼 등 신분 간 이동은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달리트는 카스트에도 끼지 못한 소수부족이나 최하층민을 말한다. 보통 고기나 가죽, 시체를 다루거나 빨래하기, 변 치우기와 같은 더럽고 힘든 일을 맡는다.
개울에서 빨래하는 달리트 출신 여인.

종교·사회의 원활한 운용과 구성원들의 효율적 분업을 위해 시작된 카스트는 수십세기를 거치면서 세계에서 가장 견고한 신분제로 굳어졌다. 대부분 역사가 증명하듯 상위 계급은 많은 특권을 독점했으며 하위 계급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행태를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했다. 영국은 18세기 효과적인 식민통치를 위해 인도의 카스트를 더욱 왜곡, 공고화하는 데 일조했다. 

◆하층민 대상 취업·교육 우대 정책
현대 인도는 영국으로 독립한 1947년 제헌 헌법을 통해 카스트 철폐를 공식화한다. 카스트에 기반한 차별을 금지한 것이다. 이로써 인도 제헌헌법을 입안한 BR 암베드카나 KR 나라야난 대통령(재임 1997∼2002년), 거리서 차를 팔던 나렌드라 모디 현 총리와 같은 하층민 출신들의 정계 진출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인도인 절반 이상이 거주하고 있는 미개발·시골 지역에선 카스트가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인도 정부는 카스트가 끼친 불합리와 불의를 바로잡기 위해 1950년부터 특정 카스트(SC·scheduled caste)와 부족(ST·scheduled tribes)에 대한 우대 정책을 폈다. 최하위 계급·부족에게 공무원 임용과 대학생 선발에 있어 일정 인원을 할당하기 시작했다. 인위적으로라도 소외 계층이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도록 ‘일자리·교육 사다리’를 제공해야한다는 취지였다. 1989년부터는 ‘기타 하층민’(OBC·Other Backward Classes)으로 지원대상이 확대됐다.


◆취업만 된다면 신분하락도 감수
이번 유혈 시위를 벌인 이들은 하리아나주에서 주로 농사를 짓고 사는 자트 계열 주민들이다. 자트는 정부 지원 대상인 달리트나 수드라 등에 비해 비교적 풍족한 삶을 살았다. 이번 시위의 핵심은 자신들을 OBC에 포함시켜달라는 것. 직접적 계기는 최근 몇 년 간 계속된 가뭄과 흉작으로 삶이 매우 피폐해졌기 때문이다. 사회적 위상이 떨어지더라도 정부 지원을 받아 목구멍에 풀칠은 해야겠다는 절박감에서 비롯했다.

 

인도의 지난해 경제성장률은 7.3%였다. 그럼에도 인도인 4명 중 한 명은 하루 1.25달러도 채 벌지 못한다. 빈부·도농 격차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인도 인구는 12억3400만명. 10년 내에 중국 인구를 추월할 것으로 예상된다. 노동력이 곧 경쟁력이라는 말은 위정자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한정된 일자리를 얻기 위한 극심한 경쟁을 의미할 뿐이다. 인도에선 해마다 수백만명의 젊은이가 취업시장에 뛰어든다.


◆대학 정원 할당제의 유효성
하층민들에게 대학 입학 정원을 할당하는 것도 도마에 올랐다. 일부에선 자격과 능력이 안되는 하층민들에게 대학 정원을 할당해 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충분한 실력을 갖춘 다른 카스트 자녀들은 정원이 줄어 역차별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카스트에 따른 기계적 정원 할당이 경쟁의 기본 원칙마저 훼손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카스트가 폐지된 지 약 60년이 흐른 만큼 대입 우대 정책도 재고할 때가 됐다는 것이다.


이같은 주장은 미국의 소수계 우대정책(Affirmative Action)을 둘러싼 논란을 떠올리게 한다. 소수계 우대정책은 인종 등에 따른 차별을 금지한다는 취지에서 1960년대 시행됐다. 하지만 인종별 할당으로 흑인과 히스패닉에 비해 입시 성적이 높은 한인 등 아시안계가 불이익을 받는 사례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미 연방대법원은 2014년 4월 이 제도 시행 여부를 각 주 자율에 맡기겠다고 결정했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국민당 대표의 2014년 총선 유세 모습.

◆사태 주범은 정치권 포퓰리즘
이번 시위는 정치권의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일 수 있다고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전했다. 하리아나주에서 자트 카스트는 전체 유권자의 29%이다. 선거 결과를 좌지할 수 있는 무시 못할 정치세력이다. 2014년 하리아나주 지방선거에서 승리한 인도국민당(BJP)을 비롯해 인도 정치권은 지난 20여년 동안 자트 카스트를 OBC로 지정해주겠다고 호언해왔다.

지금의 주 정부도 지난해 자트에게 공무원 임용과 대학입학 정원의 10%를 할당하겠다고 합의했다. 자트의 OBC 포함 여부는 오는 7월 인도 대법원이 결정한다. 하지만 다른 카스트와의 형평성을 감안해 부결될 가능성이 크다. BBC는 “‘정치권이 선거 때마다 정원 할당과 같은 이슈를 꺼내지만 않았다면 카스트 제도는 진작에 사라졌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꼬집었다.


송민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