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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칼럼] 봄비

바람아님 2016. 3. 4. 00:10
한국경제 2016.03.03. 17:31

‘조용히 젖어드는/ 초가 지붕 아래서/ 왼종일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월곡령 삼십 리/ 피는 살구꽃/ 그대 사는 마을이라/ 봄비는 와서// 젖은 담모퉁이/ 곱게 돌아서/ 모란 움 솟으랴/ 슬픈 꿈처럼.’

박목월이 1946년 동인지 ‘죽순’ 창간호에 실은 ‘봄비’ 전문이다. 조용히 내리는 봄비를 보며 왼종일 초가지붕 아래서 그대를 생각하는 정경이 눈에 선하다. 7·5조 음률을 살린 목월 특유의 리듬감도 감칠맛이 난다. 꽃잎같이 하늘거리는 시인들의 노래를 굳이 들지 않더라도 봄비는 우리에게 꽃비요, 잔비요, 풀비다. ‘꽃 핀 만큼 적시고 땅은 질지 않게 하는’(김만순) 고운 비이기도 하다.

마침 내일은 경칩이다. 얼음이 풀리고 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절기. 겨울잠을 자던 동물들이 깨어나면서 땅은 곳곳에서 새싹을 밀어올리고 산과 들은 한껏 기지개를 켠다. 냉이 달래 쑥 같은 들나물이 달큰하게 물오르는 것도 이 무렵이다. 꽃다지, 광대나물이 곧 봉오리를 맺으면 산꽃들이 화답하듯 천지에 흐드러지리라. 나무에도 수액(樹液)이 단물처럼 고이기 시작한다. 고로쇠나무가 많은 지리산에서는 약수제를 준비하며 고로쇠 물받이 채비에 바쁘다.


봄비 속에 흙일을 준비하는 때도 요즈음이다. 예부터 경칩에는 흙일을 하면 탈이 없다고 해서 벽을 바르거나 담을 쌓기도 했다. 농가마다 가래와 써레를 다듬으며 농사 지을 준비를 하고, 다가올 곡우에 맞춰 못자리판을 둘러본다. 빗소리에 실려오는 풍년 소식을 예감하며 새벽마다 논둑을 거니는 농부의 마음처럼 봄비는 그렇게 우리 모두를 적신다.

가난한 집안에 웃음꽃이 피는 것은 또 어떤가. 그 옛날 보릿고개 뒤에도 산야에 돋는 풀잎으로 배고픔을 달랠 수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고운 봄풀과 푸른 보리밭 넘어 그리운 편지를 쓰기도 한다. 그리고는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은실 같은 봄비’(변영로)를 타고 올 답장을 기다린다.


그래서 이수복 시인도 이렇게 노래했을까.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오것다.// 푸르른 보리밭 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에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랭이 타오르것다.’(‘봄비’)

올해는 봄꽃 소식도 나흘 앞서 온다고 한다. 남녘에선 벌써 꽃축제 준비가 한창이다. 다음주부터 꽃구경을 가려면 미리 일정을 맞춰야 한다.


고두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