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 기숙사에서 생활 중인 사제스님이 왔다. 스물다섯 한창나이라 그런지 만나기만 하면 “사형님, 배고파요” 한다. 속내는 용돈이 떨어졌음을 의미하는 줄 내 잘 안다. 하지만 분주한 도시생활에 마음의 허덕임이라도 있는 것은 아닐까 하여 잠시 데리고 나가기로 했다. 이른바 봄맞이 산책이다.
아침 일찍 김밥을 쌌다. 목적지는 북한산 노적봉 코스! 산 입구에 들어서니 연두색 봄빛이 완연하다. 소풍 가방을 메고 천천히 걷는데, 조금 가니 계곡이다. 아침 안개에 물먹은 푸른 이끼가 싱그럽다. 겨우내 가맣게 죽은 줄로만 알았더니 파릇파릇 살아난 것이다. 신비감을 더해 주는 버들강아지도 몽실몽실 물가에 피었다. 물오른 나무들도 연미색을 품고 있어 살짝 입김만 불어도 싹을 틔울 듯하다. 자연은 그렇게 다시 소생하고 있었다.
산길을 걷다가 언 땅을 밀고 올라온 야생화와 풀꽃을 발견하고는 사제가 묻는다.
“사형님, 이 노란 꽃은 이름이 뭐예요?”
“음, 그건 복수초네.”
“그럼 저건 뭐예요?”
“노루귀, 청노루귀.”
“그럼 저 나무는요?”
“생강나무인가, 산수유인가 헷갈리네. 사제님아, 나는 식물학자가 아니란다.”
모르는 것은 대충 얼버무리며 희희낙락 그저 즐거웠다. 그런 중에도 잊지 않고 기특한 꽃과 나무에 일렀다.
“얘들아, 추운데 이리 오느라 애썼다.”
누가 ‘척박한 땅에 꽃과 풀이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고 했던가? 봄이 오니 풀과 꽃이 저토록 푸르게 붉게 피어나는데 말이다(春來草自靑 春來花自紅). 때마침 등산객들이 지나가며 목례를 한다. 일행은 산에 와서도 정치 얘기 나라 얘기에 여념이 없었다.
세상에 저절로 되는 것은 없다. 어린 나뭇잎도 움을 틔우기 위해 단단한 껍질 밑에서 부단히 노력했을 터이고, 키 작은 야생화도 땅을 뚫고 올라오느라 온 힘을 쏟았을 것이다.
대한민국도 새봄을 맞이하기 위해 지난 겨울 그토록 치열하게 몸부림친 것 아니겠는가. 애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민주주의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나름대로 힘써 왔다. 그것은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아름답게 도약할 대한민국을 위해서는 권리와 의무를 다하며 시민답게 살아야 한다. 한 떨기 야생화도 애써 꽃을 피울진대, 하물며 인간사회야. 순간 고개를 드니 온 산이 봄이다. 한반도 전체에도 이처럼 봄기운이 가득하리라.
그나저나 북한산 오르기가 정말 쉽지 않았다. 특히 배낭 속에서 솔솔 올라오는 고소한 김밥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사제는 그것이 그만 가라는 ‘김밥의 속삭임’이라고 했다. 결국 우린 김밥을 열었다. 도시락 속이 꽃밭이다. 노란 단무지, 초록 시금치, 갈색 우엉, 주황색 당근? 옆구리 터진 김밥도 있었지만, 그럭저럭 김에 말려 모두가 조화롭게 제 빛깔을 띠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도시락 속에도, 자연에도 화합과 조화의 꽃이 핀 것 같다. 우리나라도 그리 되었으면 좋겠다.
원영 스님
조계종에서 불교연구·교육을 담당하는 교육아사리. 저서 『지금이라도알아서 다행인 것들』.BBS 라디오 ‘좋은 아침,원영입니다’ 진행.
[중앙선데이]
입력 2017.03.26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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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4호 3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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