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7.07.04 팀 알퍼 칼럼니스트)
'아들 손자 모여 밤새 우는' 개구리는 한국적 열정의 표상
영국인은 일에서 의미 찾지만… 한국인, 의미보다 근면 앞세워
함께 밤 지새우는 팀워크 발휘… 듣는 사람 없어도 날이 밝도록
"개굴개굴 개구리 노래를 한다/ 아들 손자 며느리 다 모여서/
밤새도록 하여도 듣는 이 없네/ 듣는 사람 없어도 날이 밝도록…."
동요 '개구리'.
한국에서 자랐거나 한국에서 아이를 키워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아는 노래다.
인생의 4분의 1이 넘는 시간을 한국에서 보냈음에도, 내가 이 노래를 처음 들은 것은 불과 몇 달 전이다.
그런데 처음 듣자마자 나는 이 노래에 홀딱 반해버렸다.
노래를 듣는 순간, 내가 그 동요 속 개구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영국 출신 글쟁이로 한국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것은 마냥 화려하고 흥미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물론 한국에 있는 동안 나 스스로 자부심을 가질 만한 가치 있는 일도 많이 해왔지만, 내 직장 생활의 절반은
한국의 큰 회사들을 위한 보도자료나 마케팅 자료를 영어로 작성하거나 잡지사와 라디오 방송국에서 아무도
읽지 않을 듯한 글을 쓰고 아무도 듣지 않을 법한 그런 프로그램들을 만드는 것이었다.
내가 회사에서 쓰는 글의 절반은 듣는 사람이 없는 내용이지만, 그래도 밤새도록 노래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한국에서 배웠다.
이는 결코 내 개인적인 성취욕 때문이거나 내가 직장 동료의 롤 모델이 되려 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런 작업을 할 때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내 곁에는 언제나 아들, 손자, 며느리 다 모인 듯 반드시 팀원들이 함께한다.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내가 열심히 개굴개굴하며 쓴 글을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는 독자가 원하는 글인지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때때로 클라이언트 측 요구에 의해, 팀 전체가 밤새도록 작업할 때도 있다.
독자들이 글을 빨리 읽을 수 있게 서두르라는 강력한 요청 때문이다.
이 개구리 동요가 한국에서 보낸 내 직장 생활의 많은 부분에 대한 완벽한 비유이긴 하지만,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니라고 확신한다. 실제로 내 지인의 절반 이상이 이렇게 밤새 개굴개굴 노래해야만 하는 직업을 갖고 있다.
한 친구는 온종일 보고서를 만드느라 텍스트 상자를 이리저리 옮기며 하루를 보낸다.
또 다른 친구는 아무도 확인하지 않는 회의록을 작성하느라 각종 회의에 참석해 글을 쓰며 하루를 보낸다.
/이철원 기자
사실 이 노래는 한국 직장 생활의 많은 부분을 보여주는 절묘한 비유다.
한국에서는 선거철이 되면 후보자들에 대한 정보가 담긴 두툼한 인쇄물이 배달된다.
거기에는 때때로 후보들의 직장 경력이 포함돼 있다. 당선 확률이 없어 보이는 후보라도 ○○전자 차장으로 얼마 동안
일했으며 ○○대학을 나왔다고 반짝이는 종이에 컬러 인쇄로 보내온다.
나는 이 인쇄물들을 주로 쓰레기통 밑바닥에 깔아두는 데 사용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바쁘게 개굴개굴 대며 이 인쇄물을 만든 팀이 어디엔가 있다는 것을.
그들은 빠듯한 마감 일자를 맞추기 위해 아마도 밤샘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인쇄물이 쓰레기통으로 향하는 순간, 나는 크나큰 죄의식을 느낀다.
의미 없는 내용이지만 이 인쇄물을 읽어야 한다는 충동에 사로잡혀 나는 잠시 망설인다.
그러나 해야 할 설거지와 놓치고 싶지 않은 드라마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낸다.
그렇게 해서 인쇄물은 결국 쓰레기통으로 향한다.
지난 대선 때, 아들, 손자, 며느리로 가득한 선거운동원들은 아침 8시 30분까지도 지하철 입구에 서서 부지런히 인사하고
피켓을 흔들며 유세전을 펼쳤다. 하지만 그 시간 지하철 입구는 지각해서 허둥지둥 정신없는 직장인이나 스마트폰에
머리를 파묻고 걸어가는 청소년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대개 개구리 부대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자기의 갈 길을 바쁘게 걸어간다.
케이블TV나 라디오 방송의 채널 서핑을 해보면, 시청률이나 청취율이 0.1%도 되지 않는, 이제껏 이름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수많은 개구리 채널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프로듀서, 엔지니어, 작가로 구성된 팀들은 아마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 프로그램을 만들 것이다. 그러나 시청자들은 오직 '무한도전'이나 박보검이 출연하는 드라마에만 관심을 가질 뿐,
그런 프로듀서나 엔지니어, 작가 등의 노력을 완전히 헛수고로 만든다.
만약 이것을 한국 사회에 대한 장황한 비난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완전한 오해다.
내게 밤새도록 열심히 일할 수 있는 한국인의 능력은 무척 인상적이다.
영국의 많은 기업이 망하거나 다른 나라에 매각됐다.
영국인은 회사나 팀을 위해 열심히 일하기보다 자기가 하는 일에서 자기만의 의미와 가치를 찾으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인은 자신이 맡은 업무가 얼마나 의미 있는지 따지기보다 날이 밝도록 열심히 일한다.
너무 지나친 자기반성과 평가는 종종 긍정적인 결과 대신 무기력한 정체(停滯)를 빚을 수 있다.
반면 에너지는, 심지어 혼자 개굴개굴 우는 에너지조차도, 더 큰 에너지를 끌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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