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수아 자비에 파브르 '아르노강 북변에서 바라본 피렌체 풍경'
네덜란드 루이즈 공주, 불행한 정략결혼과 격정적 연애 … 화가 파브르의 온화한 사랑까지
'풍파'의 삶 끝에 얻은 평화 같은 눈부신 봄날 오후의 공원 풍경
네덜란드 루이즈 공주, 불행한 정략결혼과 격정적 연애 … 화가 파브르의 온화한 사랑까지
'풍파'의 삶 끝에 얻은 평화 같은 눈부신 봄날 오후의 공원 풍경
몇 해 전 에든버러의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을 방문했다. 그 때 프랑스의 신고전주의 화가 프랑수아 자비에 파브르가 그린 한 풍경화 앞에서 오래도록 눈을 떼지 못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것은 단지 화면의 배경을 이루는 피렌체의 아름다운 광경 때문만은 아니었다. 왠지 그 그림에는 예사롭지 않은 사연이 숨겨져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림 앞부분에 묘사된 세 사람.그 중에서도 우아한 옷차림의 귀부인은 무언가 감상자들에게 많은 얘기를 들려주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얼마간 자료를 검토한 끝에 그녀가 바로 파란의 생애를 보낸 네덜란드의 루이즈 공주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평생 세 명의 남자와 삶을 함께했다. 첫 번째는 멋모르던 시절 어머니(호른의 엘리자베스 공주)의 결정으로 맺어진 정략결혼이었고,두 번째는 자신이 사랑한 남자와의 불같은 열애,세 번째는 말년에 자신을 보호해 준 남자와의 안락한 삶이었다.
첫 번째 남자는 명예혁명으로 퇴진한 제임스 2세의 후손으로 왕권회복운동을 벌였던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였는데 겨우 성년이 된 그녀보다 32년이나 연상으로 결혼 당시 52세였다. 정치적 거물과의 삶이 순탄할 리 없었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후 계속된 파란은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유일한 희망은 남편이 잉글랜드를 타도하고 왕위에 올라 왕비가 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1774년 알바니 백작 부처라고 자칭한 후 피렌체에 자리잡았다. 이 때 루이즈는 두 번째 남자인 비토리오 알피에리를 알게 된다. 귀족 출신으로 시인이며 극작가인 알피에리는 이들 부처의 집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루이즈는 젊고 패기 넘치는 이 이탈리아 남자와 곧 격정적인 사랑에 빠지고 이후 둘은 오래도록 은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한편 남편의 복위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고 2세를 보기도 어려워지자 그녀의 장밋빛 희망은 점차 사라져 갔다. 게다가 좌절한 찰스 에드워드의 알코올 중독과 그에 따른 학대로 그녀는 마침내 수도원으로 피신한다.
1786년 우여곡절 끝에 찰스 에드워드와의 별거를 공인받은 루이즈는 파리에서 알피에리와 본격적인 동거에 들어간다. 그 사이 그녀의 삶을 짓누른 전 남편 찰스 에드워드는 숨을 거뒀고 1792년 그녀는 알피에리와 함께 혁명 전야의 프랑스를 떠나 피렌체로 돌아간다.
둘은 아르노 강가에 거처를 정한 후 살롱을 열고 피렌체의 명사들을 저택에 초대한다. 단골손님 중에는 장차 제3의 남자가 될 프랑스 출신의 화가 프랑수아 자비에 파브르라는 인물도 끼어 있었다. 파브르는 신고전주의의 대가인 자크 루이 다비드의 제자로 1787년 로마대상을 수상한 후 이탈리아에 유학했다가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피렌체에 정착한 인물이었다.
그는 특히 토스카나 일대에서 고전적 풍격의 초상화가로 이름을 날렸고 알피에리 부부와 두터운 친분을 쌓았다. 모두 다 고향을 떠나온 세 사람은 묘한 동질감을 느끼며 때로는 아르노 강가의 저택에서, 때로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인생과 예술을 논했다.
그로부터 10년 후(1803년) 알피에리가 죽자 마음 붙일 곳을 잃은 루이즈는 알피에리의 둘도 없는 친구이자 자상하게 자신을 챙겨 주던 14년 연하의 파브르와 백년가약을 맺는다. 세 번째 결혼은 알피에리와의 관계만큼 로맨틱하지는 않았지만 격정과 파란의 연속이었던 전 남편과의 관계에서는 찾기 힘들었던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첫 남편의 망령은 모질게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스튜어트 왕조의 소생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한 나폴레옹이 그녀를 파리로 소환,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에 걸려 있는 '아르노강 북변에서 바라본 피렌체 풍경'은 결혼 10년째 되던 1813년 파브르가 부인 루이즈와 그녀의 전 남편 알피에리와 함께한 추억을 기리면서 그린 풍경화다. 그림을 보면 좌우의 아름드리나무 사이로 저 멀리 고도 피렌체가 뽀얀 속살을 드러내고 있고 오른쪽으로 아르노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세 남녀가 피크닉을 나온 전경의 녹지는 아르노강 북안의 서쪽에 자리한 카시네 공원이다. 이곳은 원래 메디치가의 사적인 정원이었는데 1737년 메디치가의 대가 끊기고 새로이 이곳의 소유자가 된 합스부르크-로렌가가 대중을 위한 휴식공간으로 개방했다.
이 공원은 문을 연 지 3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피렌체 시민들의 쉼터로 사랑받고 있다. 전경과 주변의 녹지가 눈부신 연둣빛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그림은 봄날 오후에 그려졌음이 분명하다. 나긋나긋한 자태로 서 있는 나뭇잎의 꼼꼼하면서도 간드러진 묘사는 화면에 평화로운 느낌을 부여한다. 바람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도 그러한 효과를 자아내는 데 한몫하고 있다.
전경의 세 사람 중 땅바닥에 누워 턱을 받치고 있는 사람은 아마도 알피에리인 듯하고 서서 와인을 마시는 듯한 사람은 화가 자신으로 보인다. 그 사이 숄을 걸치고 누운 자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는 귀부인은 물론 루이즈이리라.
알피에리는 10년 전 그녀의 곁을 떠나갔지만 그녀는 결코 전 남편이 남기고 간 마음의 빈자리를 채우지 않았다. 파브르는 자신이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없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루이즈가 세상을 뜬 후 파브르는 그녀를 알피에리 옆에 안치한 후 프랑스로 돌아갔다. ) 그래서 그는 아마도 소외감을 달래기 위해 와인을 들이켜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작품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보이지 않는 힘.그것은 루이즈가 수많은 풍상 끝에 도달한 달관과 고요의 경지였다. 마치 배경의 피렌체가 파란의 역사를 헤치고 오늘의 평화를 이뤄낸 것처럼.오늘도 미술관을 찾은 관객들에게 루이즈는 담담히 자신이 걸어온 과거를 들려준다. 한때 왕비를 꿈꿨던 비련의 여인이 있었노라고.평생 사랑을 위해 살았던 여인이 있었노라고.
정석범 < 미술사학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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