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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도심 속 녹색 숨구멍… 네가 있어, 내가 산다

바람아님 2018. 6. 9. 07:28
조선일보 2018.06.08 03:00

[나의 오아시숲]

[Cover Story] 월드컵공원·도산공원… 명사들의 '나만의 작은 숲' 이야기

"물소리 시원한 수성동 계곡에선 詩句가 절로 "… "사무실 근처 도산공원, 나무랑 같이 나도 광합성"

[나의 오아시 숲]
양정우 PD에게 서울 월드컵공원 소나무숲은 마음이 닿는 종점이다. 답답한 편집실에서 나와 맘껏 숨 쉬고, 머리를 비워내고 나면 다시 채울 여백이 생긴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답답해 걷다 보면 발걸음이 멈추는 종점은 항상 이곳이었어요. 어떤 날은 마음먹고 다른 쪽으로 돌아가 보기도 했는데 결국엔 이 자리였죠."

'꽃보다 청춘' '삼시세끼' '숲 속의 작은 집' 등 tvN 인기 예능 프로그램을 나영석 PD와 함께 연출한 양정우(35) PD에게 서울 상암동 월드컵공원은 마음을 기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숲이다.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DMC)에 있는 회사를 빠져나와 10~15분만 걸으면 신록과 마주한다. 좋아하는 지리산 하동의 숲으론 당장 갈 순 없지만, 이곳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닿을 수 있다. 이 숲에서도 그만의 '숨구멍'은 월드컵파크 3단지 삼거리에서 공원으로 진입하면 바로 만나는 소나무숲 산책로. 아름드리 소나무가 만든 그늘을 조용히 걷기도 하고 나무 벤치에 앉아 사색한다.

"여행이나 자연 배경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지만 촬영 현장에 있는 시간보다 2평 남짓한 방송국 편집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요. 답답할 땐 편집실을 나와 이곳 숲길을 걷다 보면 과부하 걸렸던 머릿속이 비워지면서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해요. 집과 일터 근처에 언제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나만의 작은 숲이 있다는 건 축복이죠." 양 PD가 웃으며 말했다.

"숲에 가서 그 기운을 흠뻑 마셔라. 햇빛이 나무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것과 같이 자연의 평화가 우리에게 흘러들어올 것이다. 바람이 신선함을 그리고 에너지와 열정을 우리에게 선사할 것이다. 걱정은 가을의 낙엽과 같이 떨어져 없어질 것이다."

환경운동가이자 작가인 존 뮤어(1838~1914)의 명언처럼 일상의 동선에서 만나는 크고 작은 숲은 현대인들에겐 치유의 공간이 된다. 꼭 대자연의 울울창창한 숲이 아니어도 된단다. 박수진 국립산림과학원 산림복지연구과 임업연구사는 "울창한 숲을 찾아가는 것도 좋지만 평소 좋아하는 숲을 자주 찾아가는 게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다"며 "숲길 2㎞를 30분간 걸으면 긴장, 우울, 분노가 줄어들고 인지 능력이 향상된다"고 했다. '숲세권'(숲과 역세권을 합친 말로 집과 직장 주변에 숲이 있는 지역)이란 말까지 등장했다.

명사들에게 자주 찾아가 걷고, 쉬고, 즐기는 나의 작은 숲 이야기를 들었다. 마음속 오아시스 같은 숲, '오아시숲'이다.

[나의 오아시 숲]
양정우 PD의 일상 속 작은 숲 서울 상암동 월드컵공원.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가든디자이너 오경아의 설악산 '명상 길'

"도시의 밀봉된 공간에서 사는 게 너무 답답했어요. 출근할 때 마포대교나 서강대교를 건널 때부터 숨이 막히는 것 같았죠."

16년간 방송작가로 활약했던 오경아(50·정원학교 대표)씨는 2005년 8년 동안 했던 MBC '지금은 라디오 시대'를 마지막으로 영국으로 떠났다. 퇴사 2주일 전까지 알뜰하게 일을 했다. 'MBC 연기대상 라디오 작가상'까지 받은 직후였지만 더는 일에 미련이 없었다.

이어진 삶의 다음 코스는 '정원'이었다. 8년간 영국 에식스대학교 대학원 조경학 박사과정을 밟고 돌아와 가든디자이너로 활동했다. 속초에 '오경아의 정원학교'를 만들어 원예 교육 등도 한다.

정원학교 교정에 해당하는 정원은 100여 종의 꽃과 식물들로 가득하다. 저마다 제철이라고 뽐내는 파란색 무스카리, 연분홍색 장미부터 상추와 가지, 오이 등 텃밭 작물까지 짜임새 있게 나누어진 땅에서 알차게 자라고 있었다.

"정원이 인간의 영역이라면 숲은 신의 영역이죠. 엄밀히 말하면 정원과 숲은 다르지만 마음을 두는 나만의 작은 숲은 이 정원이에요. 매일같이 마주하는 이곳에서 심신을 회복하니까요."

정원학교의 정원이 오 대표에게 일상을 함께하는 '반려숲'이라면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가는 설악산 '명상 길' 숲은 학교와 같은 곳이다. 산책길 우연히 발견하는 식물을 자세히 관찰하며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모양을 눈에 담는다.

"사적인 숲이라 할 수 있는 정원도 결국 자연스러워 보일 때가 가장 아름답죠. 설악산 명상 길에선 어우러짐의 미학에 대해 많이 배웁니다. 맑은 공기 마시며 건강도 챙기고요!" 오씨는 자연 속에서 감각을 깨워야 생존 능력이 살아난다고 했다. 밀봉된 건축 공간에서 밀봉된 것들을 마트에서 사다 먹다 보면 감각이 무뎌질 수밖에 없고, 감각이 무뎌진다는 것은 결국 생존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한단다.

"숲을 가까이에서 매일 마주하다 보면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되죠. 그 깨달음이 삶에 많은 변화를 가져올 겁니다."

추천코스 설악산국립공원 '명상 길'은 1.3㎞ 코스로 평지를 걷듯 무난한 코스다. 명상 길엔 '숲속의 공간' '사색의 공간' '명상의 공간' 등이 있다. 명상 길 산책 후 여유가 있을 땐 '신흥사'나 '비룡폭포' '흔들바위'까지 갔다가 되돌아오기도 한다. 코스를 걷다 보면 울산바위 전망 공간, 계곡도 나와 산책이 지루하지 않다.

산악인 엄홍길의 북한산 순례길


"우이동 집에서 10~15분만 걸으면 북한산 둘레길 2코스인 '순례길' 코스와 만나요. 매년 4월 19일 강북구 중학생들과 '국립4·19민주묘지'를 가면서 순례길에 애착이 더 생겼어요. 걷기에 무리 없고 무엇보다 우연히 만나는 야생화들이 많아 갈 때마다 새로운 마음이 듭니다."

산악인 엄홍길(58) 대장이 사랑하는 일상의 반려숲은 서울 북한산 순례길에 숨어 있다. "풀과 나무만 있는 숲보단 꽃이 많은 숲을 좋아한다"는 엄 대장은 "산에 자주 못 오를 땐 그곳에 가면 숨통이 트이고 내 세상 같다"고 했다. 13년째 사는 집을 못 떠나는 이유 중 하나도 북한산 때문이다. "아무런 준비 없이도 문만 열고 나서면 산과 만나니 이만한 곳이 없단 생각이 들어요."

'엄홍길 휴먼재단' 등 대외 활동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 산에 오를 수 없을 때도 틈틈이 북한산을 찾는다. "마치 고향 뒷산에 기대어 사는 것 같다"고 했다.

순례길 코스는 1910~1940년대 독립운동을 설명해 놓은 표지판과 강재 신숙 선생의 묘역부터 심산 김창숙 선생, 이시영 선생, 광복군 합동 묘역 등 독립유공자 묘역이 이어져 있어 일부러 찾는 사람들도 있다. 조금 무거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가끔 내가 가는 길이 맞는 것인가 의문이 들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순국선열의 묘역이 있는 순례길 구간을 조용히 걷다 보면 숙연해져요. 표지판이나 비석의 글귀를 조용히 음독하며 마음속으로 되새겨보기도 해요. 깨달음이 있는 숲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추천코스 국립4·19민주묘지에서 목례 후 북한산 둘레길로 진입해 순례길 코스를 따라 걷는다. '국립4·19민주묘지'가 내려다보이는 전망대, 보광사, 섶 다리를 재현해 놓은 구간, 계곡 쉼터가 이어진다. 이순열사묘역(아카데미하우스 호텔 방향)으로 내려온다. 천천히 걸으면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소나무숲길과 흰구름길 코스 사이에 있어 연계해 둘레길을 걸어볼 수 있다. 국립4·19민주묘지 인근 '어심가'는 산 이름의 별실을 갖춘 일식집. 엄 대장이 산 이름을 붙여줄 정도로 자주 가는 단골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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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가든디자이너 오경아씨가 자신이 운영하는 강원도 속초의 ‘오경아의 정원학교’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② 서울 옥인동 수성동계곡에 발 담그고 있는 신현림 시인. ③ 집 근처 북한산 순례길 코스를 좋아한다는 엄홍길 대장. ④ 대표적인 도시 숲인 도산공원을 자주 찾는다는 유현준 교수. / 김종연·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시인 신현림의 수성동계곡

"경기도 의왕이 고향이지만 서울살이를 하게 된다면 꼭 서촌에서 살고 싶었어요.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속 인왕산을 매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불편한 것들은 참을 수 있을 것 같았죠."

서울 옥인동 옥인연립에 사는 시인 신현림(55)은 인왕산의 동쪽 능선 자락에 있는 수성동계곡 산책로를 종종 찾는다. 수성동계곡은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에도 등장한다. 매일 갈 정도로 부지런하지는 못하지만, 흔들거리며 멀미 나는 조그만 종로09번 마을버스에서 내렸을 때 수성동계곡과 인왕산이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마주하면 모든 것이 용서된단다. "지금은 물이 말라 물소리가 크게 들리지 않지만 비가 많이 온 뒤 물소리까지 더해지면 속세의 온갖 소음을 다 털어내는 것 같이 속 시원하죠."

늦은 작업을 하다 보면 아침잠이 많아진다는 신씨는 오전 시간대보다 해 질 녘에 산책을 나서는 편이다. 입구에서 걸어서 10분 정도면 전망대에 닿는다. "운동이나 등산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들도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숲이어서 좋아요. 서울 도심에서 별 수고 없이 발 담글 수 있는 계곡을 품은 숲이어서 고마운 곳입니다."

수성동계곡에만 오면 시가 절로 써진다는 신씨는 어딘가에서 울리는 딱따구리 소리에 반가워했다. "어머나! 귀에 거슬리지 않는 전동 드릴 쏘는 것 같지 않아요? 우연히 이런 소리를 듣게 된 날은 무지개를 본 것처럼 온종일 기분이 좋다니까요(웃음)."

추천코스 남대문, 시청역, 프레스센터, 세종문화회관 등을 경유하는 '종로09번' 마을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리면 수성동계곡과 바로 만난다. 계곡을 낀 산책로를 한 바퀴 돌아 내려와 박노수미술관에 들르거나 서촌의 아기자기한 빵집, 소품숍을 구경한다. '오씨솜씨' '밥플러스' 등이 신씨의 단골 혼밥집. 각각 야채된장소스덮밥, 메밀국수를 추천했다. "통인시장이나 대림미술관도 걸을 만한 거리에 있어 내친김에 이어가기 좋아요."

건축가 유현준의 도산공원

"숲은 도시에 있을 때 빛이 난다고 생각해요. 대도시 한복판에 있는 뉴욕 맨해튼 센트럴파크의 숲을 좋아합니다. 한 발 옮기면 공원, 한 발 옮기면 근사한 카페가 있어 접근성이 뛰어나죠. 규모는 훨씬 작지만 입지상으로나 기능상 서울 강남엔 도산공원(도산근린공원)이 비슷해요. 강북에선 덕수궁을 좋아해요."

건축가인 유현준(50) 홍익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는 이따금 혼자서 오롯이 쉬고 싶을 때 그의 사무실이 있는 학동사거리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도산공원을 즐겨 찾는다. "도산공원 나무들은 빽빽하게 숲을 이루지 않아요. 빈 공간에서 독립적으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대부분 홀로 서 있죠. 그 적당한 거리가 마음 편하게 해줘요. 사람 관계도 이처럼 일정한 거리, 적절한 거리를 두고 서 있는 게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주죠."

틈나면 나무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서 광합성을 즐긴다. "어느 일이나 그렇겠지만, 건축은 특히 비우기가 필요한 작업이라 숲에 오면 최대한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우리 삶이란 게 늘 대인 관계 상태에 있잖아요. 잠시라도 숲에서 자발적으로 고립되는 상태를 즐기죠."

덕수궁은 동선 따라 귀에 들리는 소음과 눈에 보이는 전망이 달라져 재미있는 공간이다. 시청 등 주변에 우뚝 솟은 현대식 건축물과 그 아래 세월을 견딘 건축 유산이 자아내는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정문 통과해 연못 옆에 앉아 연못과 나무, 담장, 구시청과 신시청 건물이 겹겹이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고만 있어도 힐링 된다.

"건축의 완성은 그 공간에 사는 사람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채워주는 건 자연이고요. 자연을 어떻게 배치하는 게 좋을지 늘 고민하는데 숲에서 답을 얻곤 해요. 숲에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적절하고 아름다운 불규칙성이 있거든요."

추천코스 산공원 동측 공원이 비교적 한적하다. 산책 후 퀸마마마켓 건물 4층에 있는 '매뉴팩트커피'에 가 도산공원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앉아 커피 마신다. 숲을 내려다보기에 좋은 자리다. 가끔 도산공원 산책 전후로 '쉐이크쉑 청담점'에서 버거를 사서 CGV 청담점 가서 혼자 영화를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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