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3.03.21 손철주 미술평론가)
등뼈를 꼿꼿이 세우고 앉았다. 한곳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품새가 단정하고 엄숙하다. 복색은 '블랙 앤 화이트'인데, 절제된 단순성이 멋스럽다. 차림에서 벌써 기품이 감돈다. 그가 입은 옷은 심의(深衣)다. 사대부와 유학자의 간편복인 심의(深衣)는 위와 아랫도리가 붙은 홑겹의 하얀 겉옷이다. 깃은 곧고 소매는 둥글되 검은 헝겊을 깃과 소맷부리와 옷단에 덧대는 것이 이 옷의 조촐한 꾸밈이다. 검은 복건과 한결 어울리고, 가선을 두른 허리띠에 갖은 색실로 짠 술띠를 드리워 새뜻한 인상을 풍긴다.
서안에 놓인 필통과 벼루, 서책과 향로로 미루어 문인이 분명하다. 정조 시절 판서 벼슬을 두루 지낸 윤동섬(尹東暹· 1710~1795)이 초상의 주인공이다. 필력이 뛰어나 정조의 아낌을 받은 서예가인데, 궁중의 문서는 늙은 그가 도맡아 썼다. 비문에 쓴 글씨도 여럿 남아 있다. 흥미롭게도 초상화에 긴 글이 있다. 윤동섬의 호는 '팔무당(八無堂)'이다. '여덟 가지가 없다'는 얘긴데, 그게 뭘까. 그는 그림에서 털어놓았다. '재주와 덕이 없다. 뜻과 생각이 없다. 겨루는 마음과 가슴속에 쟁여둔 것이 없다. 터득한 것이 없고 이익이 없다.'
말 그대로라면 윤동섬은 무지렁이다. 그는 한탄한다. '기개가 모자란 데다 즐길 줄도 모르고 힘도 부족하니, 높은 벼슬은커녕 산속에서 사는 게 맞지 않겠는가.' 그의 '자책'을 곧이곧대로 들을 일은 아니다. 옛사람의 어법으로 짐작건대, 호된 반성일 테다. 그는 강골에 가깝게 생겼다. 마름모꼴 얼굴이 굳건하고 치켜올라간 눈썹에 기상이 서렸다. 광대뼈가 높고 하관이 빨아 강퍅한 느낌마저 풍긴다. 안목은 고상했겠다. 산수화 문양의 사각필통과 색색의 붓대는 서예가다운 호사이고, 나뭇잎 모양으로 굽다리를 만든 향로는 이국적 취향을 은근히 드러낸다. 허풍은 날아가고 겸양은 새겨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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