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3.05.17 손철주 미술평론가)
유숙(劉淑)-오수삼매(午睡三昧)… 19세기,
종이에 먹, 40.4×28㎝, 간송미술관 소장.
승려는 두 손을 무릎 위에 모았다. 고개를 떨구고 낮잠을 잔다. 오죽 고단했으면 길바닥에 앉아 까무룩 잠에 빠졌을까. 겉모습이 왠지 가엾고 구슬프다. 수그린 머리 뒤로 드러난 목덜미는 메말랐다. 몸에 걸친 장삼은 소매와 품이 나우 넓다. 잔뜩 옹송그린 등짝을 타고 흘러내린 옷자락이 낡았고, 해졌고, 꾀죄죄하다. 그림 제목이 '오수삼매(午睡三昧)'다. 그린 이는 유숙(劉淑·1827~1873)이다. 유숙은 철종과 고종의 어진을 제작했던 화원이다. 인물의 기미(氣味)를 살피는 그의 눈썰미는 이 작품에서도 살아있다.
하나씩 뜯어보면 기법이 재미롭다. 아무 배경 없이 인물로 화면을 채웠다. 존재감이 더 우뚝해졌다. 얼굴과 손발은 세심하게 그려 실상에 바싹 다가간다. 이른바 붓을 놀리는 '필법'이 또렷하다. 옷 주름은 어떤가. 기운이 거칠게 몰려 짙고 옅은 변화가 어지럽다. 이게 먹을 쓰는 '묵법'이다. 곧 붓의 묘사와 먹의 표현이 한자리에서 부닥친 셈이다. 효과는 드라마틱하다. 그림에서 사뭇 선미(禪味)가 감돌고 보는 이의 동조를 쉬 끌어낸다. 이윽고 궁금해진다. 저분, 이력이 어떤 승려일까.
어쩐지 옷이 거북 껍데기 같기도 하다. 속으로 감추려는 것은 수도하는 자의 욕념이고, 겉으로 보이려는 것은 업보를 짊어진 각오다. 아무려나 승려는 머나먼 길을 걸어왔을 테다. 까칠한 머리칼 사이로 보인다. 드문드문한 흠집은 풍상의 흔적이다. 앞이 터진 짚신에서 발가락이 튀어나왔다. 원행의 괴로움을 넌지시 알려준다. 신분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집집을 다니며 경문(經文)을 외우고 동냥하는 탁발승이 아닐까. 저 구저분한 먹빛 옷이 박음질 없이 하늘하늘한 천의(天衣)보다 미덥다.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깨닫고, 길에서 가르치다, 길에서 돌아간 부처가 생각나서다. 스님! 그만 깨어나십시오.
<큰이미지-유숙(劉淑)-오수삼매(午睡三昧)>
< "유숙(劉淑)-오수삼매(午睡三昧)"에 대한 또다른 해설>
불교신문 (1997.03.18)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9089
(선화를 찾아서)유숙의 "오수삼매"
잠에도 삼매가 있을까. 이러한 질문에 답하는 것이 "오수삼매도"다. 구도 열정에 사로잡힌 선승들의 진지한 모습은 그 자체가
하나의 아름다움이며 좋은 그림의 소재일 수가 있다. 물아일체에 빠져 시공과 동화된 선승의 모습은 보는 사람들을 팽팽한
긴장으로 빠지게 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소개할 작품은 유숙의 "午睡三昧"다. 蕙山 劉淑(1827-1873)은 철종 때의 화원으로
47세의 짧은 생애를 살았다. 그의 대표작은 국립중앙박물관 에 소장된 "세검정도"이다. 유숙은 조선후기의 명화원으로 이름을
날린 오원 장승업의 스승이었다는 추측도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는 주로 문인화계의 산수화와 인물화등의 전통적인
정형의 그림을 잘 그렸으며 민화 풍의 그림도 그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수삼매도"는 등을 굽히고 쪼그리고 앉아 머리를
무릎에 묻은 채 잠시 오수삼매에 빠진 한 선승의 모습을 대담한 묵선의 강약으로 표현한 걸작이 다. 배경도 없이 화면을 꽉
채운 선승의 모습은 강렬한 구도열정이 사실적 으로 배어나고 있다. 유숙은 전반적인 균형을 이루기 위해 함축적인 단한번의
필획으로 의습선 을 그려내고 있다. 의습선의 강약은 농담의 변화가 많은 묵법을 통해 표현 했다. 이와같은 독특한 표현법은
유숙회화의 한 특징으로 파악된다. 농담의 강약으로 표현된 먹선의 굵고 느린 움직임은 한가하고 조용한 분위 기보다는 팽팽한
긴장감을 조성, 화면속으로 시선을 잡아당기고 있다. 이렇 게 무릎에 얼굴을 묻고 등을 굽혀 쪼그리고 앉은 자세는 김홍도의
"達磨折 蘆坐睡渡海圖"나 이수민의 "坐睡渡海圖"에서도 같은 모습을 볼 수 있어 당시에 유행했던 화풍의 상호연관 관계를
찾아볼 수 있다. 유숙의 "오수삼매"는 잠시 오수에 든 선승의 모습을 그린 畵題의 파격과 간단한 구도, 거침없는 필법등이
탈속의 분위기를 짙게 풍기고 있는 수작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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