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11.23 태영호·전 북한 외교관)
[아무튼, 주말- 평양남자 태영호의 서울 탐구생활]
北서 미신은 5대 범죄 중 하나이지만 간부층 아내들까지 여전히 부적 써요
한국에 와서 사람들이 여름에 더위를 쫓기 위해 귀신 나오는 공포 영화를
보러 간다는 얘기를 듣고 이해가 안 됐다. 귀신을 보러 간다니.
길거리에 나치 깃발 같은 것이 걸려 있는 걸 보고 놀라서 물어보니 점집이라고
했다. 공개적으로 점집을 차려 놓거나 무당 굿을 하는 것도 신기했다.
북한은 예술 문화 정책으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표방하기 때문에
귀신 나오는 공포 영화를 방영하지 않는다. 유일한 공포 영화라면 신상옥·최은희
선생이 만든 '불가사리'인데 그마저도 그들이 탈북한 후 상영 금지되었다.
북한에서 미신 행위는 마약, 성매매, 도박, 밀수와 함께 5대 범죄에 속한다.
형법상 '사회주의 공동생활 질서를 침해한 범죄'로 분류된다.
최고 7년의 노동 교화형에 처하게 돼 있다.
현실은 따로 논다. 사회적으로 합리적인 의사 결정 시스템이 부족하고 정책이 오락가락하니 미신에 의지하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무속이나 사주풀이 관련 책을 이용해 점을 보거나 관상과 손금을 본다.
생년월일을 따져 십이지와 음양오행을 계산기 두드려 가며 봐주는 방법도 있다. 이 가운데 책을 보는 것을 제일 심각한
미신 행위로 본다. 책을 가진 점쟁이들은 지속적으로 불법행위를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섣달 그믐에 새해 운세를 알아보거나, 아이 이름을 지을 때, 장사를 시작할 때 점을 보는 건 기본이다.
불법 밀수품을 들여올 때 보안서나 보위부에 걸리지 않겠는지 점쟁이에게 물어보는 사람도 많다.
간부 아내들이 남편 승진이나 보직 이동, 해임, 철직(직위 해제) 등 신상을 알아보고 부적을 붙이거나 액땜하기도 한다.
사주풀이가 기록된 책이 높은 가격에 거래된다. 몰래 사주 명리학을 공부해 전문 점쟁이가 되는 사람도 있다. 북한에서
점을 한번 보려면 보통 쌀 5~15kg 정도 살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낸다. 용하다는 곳은 쌀 50kg어치 돈을 내야 한다.
북한에서 점쟁이가 많아진 것은 90년대 말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다. 이때 한국에서 출판한 사주팔자 책이 많이
밀수됐다. 나도 사주팔자 책을 빌려 밤새워 보면서 운세를 연구해 본 적이 있는데 한자가 너무 많아 이해하기 어려웠다.
평양에서는 단속이 심해 지방에 사는 점쟁이가 평양 친척집이나 아는 사람 집에 올라와 며칠씩 머물면서 점을 친다.
이때 친한 사람끼리 연락해 귀띔해주면 조용히 모여든다.
가족이 현대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는 불치병에 걸려도 점쟁이를 찾는다.
1990년대 초 내가 북한 외무성에서 일할 때 나이 든 직원 한 분이 아내 병을 고치려고 점쟁이가 하라는 대로 액땜을 했다가
지방으로 추방되는 사건이 있었다.
사연은 이랬다. 간암 진단을 받은 아내의 병세가 악화돼 점쟁이를 찾아갔다. 점쟁이는 모란봉 을밀대 옆 나뭇가지를 꺾어
대동강물에 씻은 다음 그것을 가지고 아내와 함께 윗집 베란다에 올라가 대동강을 향해 병을 낫게 해달라고 세 번 빌라고
했다. 평생 외국을 오가며 외교관 생활을 한 그였지만 점쟁이가 하라는 대로 했다. 윗집 주인 부부가 직장에 가고 중학교
다니는 딸만 있을 때 베란다에 올라가 대동강을 향해 나뭇가지를 흔들면서 빌었다. 이걸 지켜본 윗집 딸이 아버지에게
일러바쳤다. 외무성 당위원회에 신고가 들어가 그 직원은 지방으로 추방됐다. 결국 아내는 간암으로 사망했다.
점은 미래에 대한 불안 심리를 파고든다. 최근 대북 제재 속에서 미신 행위가 빠르게 퍼져 나가자 북한 당국은 공개 재판과
공개 처형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지난 9월 19일 자 북한 노동신문은 "지금 적대 세력들이 우리 내부에 종교와
미신 등 부르주아 사상 독소를 유포시키기 위해 끈질기게 책동하고 있다"면서 미신 행위를 경고했다. 나는 미신을 믿는 편
은 아니지만 형법으로 점이나 사주팔자를 봐주는 것을 다스리는 것은 지나친 인권유린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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