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까닭으로 사람의 눈길이 닿지 않는 양반가의 으슥한 후원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왜 양반가인가.
아낙네의 손을 잡아끄는 사내의 얼굴을 보자. 아직 수염도 안 자란 앳된 사내다. 그런데 사내는 사방관을 쓰고 있다.
지난번 ‘우물가의 사랑’에서도 말했지만, 사방관은 점잖은 양반네들이 주로 실내에서 쓰는 관이다.
집 주변은 쓰고 돌아다닐 수 있지만, 그렇다 해서 먼 곳으로 나들이할 때 쓰는 것은 아니다.
이 젊은 사내는 지금 후원 으슥한 곳에서 여자를 꼬드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자는 누구인가.
●“봄의 생명력은 곧 성적인 힘이다”
여자의 신분 처지를 아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여자의 입성이다. 위에는 흰 저고리를, 아래는 푸른 치마를 입었다.
이 역시 앞의 ‘우물가의 사랑’에서 나온 옷차림이다. 삼회장은 어림도 없고 다만 고름만 자주색으로 했을 뿐이다.
여기에 신발을 보라. 짚신이 아닌가.
입성으로 보아 보잘것없는 양반가의 계집종인 것이다.
하기야 입성을 따지지 않아도 후원에서 남정네에게 손목을 잡힌 사람이라면 알 만하지 않은가.
아무리 간 큰 양반이라 해도 같은 양반 부녀자의 손목을 이렇게 거만한 얼굴로 덥석 잡을 수는 없는 것이다.
여자는 앳되고 고운 얼굴이고, 손목을 잡히자 엉덩이를 뒤로 잔뜩 빼고 얼굴에는 수줍음이 가득하다.
손목을 잡는다는 것은 성적 행위의 시작을 알리는 징표다.
남녀의 사랑은 결국 성행위로 이어지기 마련인데, 그 단계는 어떤 동물보다도 복잡하다.
얼굴을 바라보고 눈을 맞추다가 손을 잡고 어깨에 손을 올리고 껴안고 가슴에 손을 대고, 그리고 최후로는 관계를 맺는다.
즉 손을 잡는 행위는 최후의 행위에 도달하기 위한 최초의 행위다.
말하자면 그것은 애정의 시작이요, 상징이다.
예컨대 이미 상대에게 익숙해진 연인들이 손을 잡고 다니는 것을 보라.‘우물가의 사랑’에서 소개했던 고려가요 ‘쌍화점’은
예외 없이 손목을 잡는 것으로 사랑이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그 첫 부분을 모아서 읽어보자.
쌍화점에 쌍화 사러 가고신댄
회회아비 내 손목을 쥐여이다
삼장사에 불 혀러 가고신댄
그 절 사주 내 손목을 쥐여이다.
두레우물에 물을 길러 가곡신댄
우물 용이 내 손목을 쥐여이다
술 팔 집에 술을 사러 가고신댄
그 집 아비 내 손목을 쥐여이다
과연 사랑은 손목을 잡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다시 그림을 보자.
그림의 오른쪽 하단과 왼쪽에는 배롱나무가 붉은 꽃을 피우고 있다.
봄은 일시 죽었던 천지에 다시 생명의 기운을 돌게 하는 계절이다.
봄이 되면 처녀 총각이 바람이 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그림의 오른쪽 상단의 화제를 옮기면 이런 뜻이 된다.
“빽빽한 잎사귀 푸른 빛을 쌓아가고/ 무성한 잎사귀에 붉은 꽃잎 조각조각 떨군다(密葉濃堆綠,繁枝碎剪紅)”
봄의 생명력은 곧 성적인 힘이다. 꽃은 식물의 성기다.
그런 고로 그림 속에 붉은 봄꽃을 그린 것은 성적인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신윤복의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자, 이제 배롱나무 옆에 있는 거대한 괴석을 보자. 괴석을 정원에 두는 것은 오래된 풍습이지만, 이렇게 거대한 괴석은 쉽게
보지 못하는 것이다.
아니, 그림 속에서 괴석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크다. 거기다 괴석은 땅에 뿌리를 박고 위로 치솟아 있다.
직선으로 솟은 것이 아니고, 왼쪽 뿌리 부분이 옆으로 불룩 나와 있다.
그리고 괴석의 윗부분의 몸체는 무언가 흰 액체가 흘러내리는 듯한 느낌이 나게 그려 놓았다.
이미 눈치 챘겠지만, 이것은 남성의 성기다.
그렇다면 이 그림의 의미는 분명하다. 이 그림의 꽃과 괴석은 각각 여성과 남성의 성욕을 상징하는 것이다.
●서얼의 탄생을 알리는 그림
현실로 돌아오면, 양반 남성이 자기 집안의 계집종을 건드리는 것은 허다하게 있는 일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서자란 그렇게 해서 나는 것이었다.
즉 양반 남성이 정식 아내가 아닌 양인의 여성과 관계하여 자식을 낳으면 서자가 되고,
만약 관청이나 사가의 여성과 관계하면 얼자가 된다.
그 둘을 합쳐서 서얼이라 한다. 조선시대의 무수한 서얼들은 바로 그렇게 세상에 나왔던 것이니,
이 장면은 바로 그 서얼의 탄생을 알리는 그림이기도 한 것이다.
양반들은 계집종을 건드리는 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성여학이 지은 ‘속어면순’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어떤 선비가 계집종을 건드리는 데 능란했는데, 어느 날 아내에게 들키고 말았다.
선비는 계집종을 건드리고 그 흔적을 감추고자 하였으나,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오래된 친구에게 그 고충을 토로하였다.
“한밤중에 종년을 덮치는 것보다 재미있는 것이 없지만, 마누라에게 들킬까봐 이게 가장 큰 걱정이야.”
“묘한 방법이 있으니, 한 번 시험해 보지 그래.”
“그래, 제발 좀 일러 주어.”
“계집종을 건드리는 데 열 가지 격식이 있어. 첫째, 굶주린 범이 고깃덩이를 탐하는 격이니, 계집종을 건드리겠다는 마음을 먹는 단계지. 둘째, 해오라기가 물고기를 엿보는 격이니, 목을 빼고 계집종을 몰래 살피는 단계지. 셋째, 늙은 여우가 얼음 아래 물소리를 듣는 격이니, 마누라가 잠이 들었는가를 살피는 단계지. 넷째, 매미가 허물을 벗는 격인데, 이불 속에서 몸을 빼는 단계지. 다섯째는 영리한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노는 격이니, 여러 방법으로 계집종을 희롱하는 단계지. 여섯째는 푸른 매가 꿩을 덮치는 격이니, 재빨리 계집종을 덮치는 단계지. 일곱째는 옥토끼가 약을 찧은 격이니, 그 환희의 순간을 형용하는 단계지. 여덟째는 용이 여의주를 토하는 격이니, 비유컨대 정(精)을 토하는 단계지. 아홉째는 소가 달을 보고 헐떡이는 격이니, 피곤하여 숨을 몰아쉬는 단계지. 열 번째는 지친 말이 집으로 돌아오는 격이니, 몰래 자기가 자던 방으로 돌아오는 단계지.”
●수신 교과서 ‘소학´은 남녀 분리 강조
다음날부터 선비는 이 방법을 써서 다시는 들키지 않았기에 마음속으로 무척 다행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다시 신윤복의 그림 ‘봄날’을 보자. 나뭇가지에는 연녹색 잎이 솟아나오고 있다.
그림 왼쪽의 남자와 여자를 보자. 남자가 입고 있는 옷은 철릭이다.
주로 무관이 입던 옷이니, 이 남자는 무반에 속한 양반으로 보인다.
여자는 짚신을 신고 앞치마를 두르고 봄날 나물을 캐러 갔으니, 양반이 아닌 계집종이거나 민간의 여염집 여자다.
그런데 웬일인가. 사내가 나물바구니에 슬쩍 손을 대고 있지 않은가.
사내의 얼굴을 보라. 벌겋다. 이 사내는 낮술에 취해 있다.
봄날 어디서 술을 마시고 돌아오다가 아는 계집종(혹은 동네 여자)을 만났다.
캔 나물을 보자며 말을 붙이고 손을 바구니에 댄다.
여자가 해사하게 웃고 있으니 싫지 않은 눈치다.
이 둘은 이미 감정의 교환이 일어난 상태다. 남녀의 일은 이렇게 해서 시작된다.
조선시대 양반들이 철석같이 믿고 따랐던 수신교과서 ‘소학’은 남자와 여자의 분리를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었다.
남자와 여자는 물건을 건넬 때도 직접 주고받지 않는다.
남자가 물건을 내려놓고 가면 여자가 와서 그것을 집어가야 한다는 것이 ‘소학’의 주문이다. 한데 어떤가.
이 그림을 보면 양반은 후원에서 계집종의 손을 덥석 잡고, 낮에 술을 마시고 길거리에서 나물 뜯는 아낙네의 바구니에 손을
대면서 수작을 건다. 어떤 것이 양반의 리얼리티인가.‘소학’의 지시를 따라 사는 것이 양반의 실제 모습의 한 축이라면,
그 축이 배제했던 욕망의 지시대로 사는 것도 한 축이다.
다만 나는 후자가 보다 인간의 모습에 가까운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 도덕은 사라질 수 있지만, 인간의 욕망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그것을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