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고전·고미술

정민의 세설신어 [117] 불필친교(不必親校)

바람아님 2014. 7. 18. 09:52

(출처-조선일보 2011.08.04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제갈량이 직접 장부를 조사했다(親校簿書). 
주부(主簿) 양과(楊顆)가 들어가 말했다. 
"통치에는 체통이 있습니다. 상하가 영역을 침범하면 안 됩니다. 사내종은 밭 갈고, 계집종은 밥합니다. 
닭은 새벽을 알리고, 개는 도적을 지키지요. 주인 혼자 하려 들면 심신이 피곤하여 아무것도 못하게 됩니다. 
어찌 이리 하십니까?" 제갈량이 사과했다.

한문제(漢文帝)가 좌승상 진평(陳平)에게 형사사건의 건수와 연간 조세 수입의 규모에 대해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잘 모르겠습니다. 주관하는 신하가 따로 있습니다. 형사사건은 정위(廷尉)의 담당이고, 
세금은 치속내사(治粟內史)가 잘 압니다." 
황제가 불쾌했다. "그럼 승상은 무슨 일을 하는가?" 
"승상은 천자를 보좌하고 조화를 살피며, 사방을 어루만지고, 관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일을 합니다. 
나머지는 책임 맡은 자가 알아서 합니다. 반대로 하면 천하가 어지러워집니다." 
황제가 승복했다.

한선제(漢宣帝) 때 승상 병길(丙吉)이 외출을 했다. 
길에서 패싸움이 벌어져 여럿이 죽고 다쳤다. 병길은 본 체도 않고 지나쳤다. 
조금 더 가니 소가 수레를 끄는데 숨이 차서 혀를 내밀고 헐떡거렸다. 
병길이 수레를 멈추고, 소가 몇 리나 왔는지를 물었다. 
좌우에서 투덜거렸다."좀 전 사람이 죽는 것은 본 체도 않으시더니 소가 숨을 헐떡이는 것은 어찌 물으십니까?" 
"패싸움은 경조윤(京兆尹)이 법으로 처리하면 그뿐, 승상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봄이라 아직 덥지 않은데, 소가 저리 땀을 흘리고 숨을 헐떡이니 날씨가 절기를 벗어난 것이다. 
이 때문에 사람이 상할까 염려해 그랬다. 
재상은 음양의 조화를 근심할 뿐 길에서 일어난 일은 묻지 않는다." 관리들이 탄복했다.

장관을 실무자 취급하는 대통령, 모든 일을 직접 다 챙겨야 직성이 풀리는 CEO, 다 민망한 풍경이다. 
식소사번(食少事煩)! 일은 많고 성과는 적다. 
불필친교(不必親校)!  할 일과 맡길 일이 따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