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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심한 공포는 숫자 아닌 불신의 고리에서 나온다

바람아님 2020. 4. 9. 20:51

(조선일보 2020.04.09 곽아람 기자)


'파올로 조르다노' 伊 스트레가상 받은 유명 작가
코로나로 봉쇄된 로마서 살며 한 달간 쓴 글과 기고문 모아 '전염의 시대를 생각한다' 펴내

"장례식조차 적막한 역병의 시대… 현재 유일한 백신은 신중함뿐"


"생각지도 못했던 모든 일이 우리 삶에 난입한 지 한 달째.

우리는 쓰레기를 버리러 나갈 때 명분이 필요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우리 개개인의 일과가 시민보호부의 뉴스에 좌우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사랑하는 사람들 없이 홀로 죽음을 맞이하고 그 장례식 또한 적막하고 외로우리란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런 일이 벌어졌다."


이탈리아의 유명 소설가 파올로 조르다노(38)는 지난달 20일 이렇게 썼다.

그는 전 세계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사망률이 가장 높은 이탈리아, 봉쇄된 로마에서 격리된 채 역병의 시대에 겪고

생각하고 느낀 것을 글로 쓰기 시작했다. 한 달간 쓴 글과 언론 기고문이 '전염의 시대를 생각한다'(은행나무)란 책으로

묶여 미국,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스웨덴, 이란 등 전 세계 26개국에서 동시 출간됐다.

저자 인세 수익은 코로나 감염자를 치료하는 이탈리아 의료 단체 등에 기부된다.

조르다노는 토리노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고, 25세 때인 2008년 발표한 첫 소설 '소수(素數)의 고독'으로

이탈리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스트레가상을 받았다.

이 소설이 전 세계에서 250만부 넘게 팔리며 명성을 얻었다.


파올로 조르다노는 지난달 28일 파이낸셜타임스 기고문에 “내 인생에서 그 어느 때보다 더 밀가루 반죽을 치대며 빵을 굽고 있다”고 썼다. “그저 반죽을 하고 싶은 것이다. 시공간의 구조가 내 이해력에서 벗어난 동안 어떤 방식으로든 앎을 통제하고 싶었다.”
파올로 조르다노는 지난달 28일 파이낸셜타임스 기고문에 “내 인생에서 그 어느 때보다 더 밀가루 반죽을

치대며 빵을 굽고 있다”고 썼다. “그저 반죽을 하고 싶은 것이다.

시공간의 구조가 내 이해력에서 벗어난 동안 어떤 방식으로든 앎을 통제하고 싶었다.” /은행나무


책은 95쪽으로 얇지만 문장은 담담하고 사유는 묵직하다.

"글을 쓰며 이 공백기를 보내기로 했다"는 조르다노는

"다소 불편이 따르겠지만, 현재 우리가 쓸 수 있는 유일한 백신은 신중함뿐"이라고 썼다.

"위기 상황에서 허황된 마술적 사고는 우리를 더 고통스럽게 할 뿐이다."

치사율이 높지 않은데, 젊고 건강한 사람들까지 일상을 포기해야 하느냐는 반론에는

"전염의 시대에 연대감 부재는 상상력의 결여에서 온다.

'인간은 섬이 아니다'라는 영국 시인 존 던의 묵상이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이유다"라고 했다.


3월 4일, 이탈리아 전 도시에 휴교령이 발표됐다.

한쪽에서는 바이러스의 위험을 강조하는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과대평가된 감기처럼 말한다.

양쪽 모두 "전문가들"을 언급한다.

조르다노는 "우리는 과학에 대한 의심이 그 어떤 진실보다도 신성하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아이들이 싸우는 모습을 부모가 내려다보듯 전문가들의 논쟁을 지켜보자. 그러고 나서 우리의 논쟁을 시작하자"고 했다.

이탈리아 신문사들이 더는 감염자 수를 발표하지 않기로 했을 때, 그는 배신감을 느낀다.

"전염의 시대에 투명한 정보는 권리가 아니라 필수적인 예방의학. 극심한 공포는 숫자가 아닌 불신의 고리에서 솟아 나온다."


지난 3일 이탈리아 북부 폰테 산 피에트로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사망자들의 관이 화장(火葬)을 기다리며 놓여 있는 모습.
지난 3일 이탈리아 북부 폰테 산 피에트로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사망자들의 관이

화장(火葬)을 기다리며 놓여 있는 모습. /EPA 연합뉴스


전염병의 기세는 꺾이지 않는다. 조르다노는 계획이 무산된 달력을 바라본다.

"여태껏 일상생활이 이처럼 중요한 의미로 다가온 적은 없었다. 우리가 지닌 가장 신성한 것이 되었다."

우리는 끊임없이 수를 센다. 감염자와 완치자, 사망자를 세고, 학교 결석 일수를 센다.

주식시장에서 날아간 수십억과 서로 떨어져 지낸 날수를 센다.

'저희의 날수를 셀 줄 알도록 가르치소서. 저희가 슬기로운 마음을 얻으리다'는 성서의 말씀(시편 90장)을

조르다노는 이렇게 해석한다.

"모든 날에, 우리에게 고통스러운 공백으로만 여겨지는 이 날에도 가치를 부여할 수 있게 하소서."


조르다노는 전쟁이 끝나면 끔찍했던 기억을 서둘러 잊으려 하듯, 질병의 고통이 사라지면 깨달음도 증발할까 우려하며

리스트를 작성했다.

"나는 처음 몇 주 동안 정부가 시행한 소심한 조치 앞에 '너희 미쳤구나'라는 질책을 잊지 않을 것이다.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했고 결국 희생자를 만들었다.

나는 유럽이 늦었다는 것을, 너무 늦었다는 것을 잊지 않을 것이다.

나는 가족 앞에서 용감하지도 의연하지도 지혜롭지도 못했다는 것을 잊고 싶지 않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4/09/202004090019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