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敎養·提言.思考 1419

[백영옥의 말과 글] [400] 내 인생 소풍이었지

조선일보  2025. 4. 4. 23:50 어떤 남자와 결혼해야 하느냐에 대한 답을 찾았다. ‘폭싹 속았수다’의 양관식이 같은 사람이다. ‘응답하라 1988’이나 ‘슬기로운 의사 생활’처럼 이 드라마는 판타지물에 가깝다. 하지만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 건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이상적 현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철학자 ‘발터 베냐민’은 짝사랑 전문가였다. 그는 ‘어떤 사람을 아는 사람은 희망 없이 그를 사랑하는 사람뿐’이라고 말했다. 첫사랑 애순이가 자신을 보든 말든 시장에서 대신 “양배추 달아요!”를 외치던 연인 관식이 그런 사람이다....누군가를 기대 없이 사랑한다는 건 빛과 어둠 모두를 품는다는 뜻이다. 사랑은 소중해서 쉽게 집착과 욕심으로 부패하기 때문이다.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문장을 나는 이승우..

[백영옥의 말과 글] [399] 불안 사회

조선일보  2025. 3. 29. 00:14 채식주의자 친구가 있다. 그녀가 비건이 된 건 실직 후, 사람에게 갈 곳 없던 마음이 동물에 대한 사랑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중학생 때 이민을 간 한 친구는 언어와 문화 차이 때문에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했는데, 그때 그녀를 지켜준 건 방과 후 특별활동이었던 수영이었다. 도망가고 싶을 때마다 물살을 가르며 마음을 다잡았다는 것이다.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건 불행이 아니다. ‘아직 확정되지 않은 불행’이다. 예측 불가능성은 인류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다. 일관되지 않은 불안정한 부모의 애정이 아이의 내면을 망친다는 건 심리학계의 정설이다. 저출산의 기저에도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있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는 지금 ‘일한다’는 곧 ‘새로 배운다’는 의미와 동일해졌다...

[백영옥의 말과 글] [398] 삶의 끝에서 떠올리게 될 것들

조선일보  2025. 3. 21. 23:50 ‘버킷 리스트’ 하면 나는 죽음을 먼저 떠올렸다. 이 말을 유행시킨 영화의 주인공이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노인 둘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버킷 리스트에는 언젠가 해보고 싶었지만 하지 못한 미래 시제의 소망이 가득하다. 번지점프나 패러글라이딩 같은 것도 있지만 가장 많은 건 타지마할, 피라미드 같은 여행 목록들이다. 그런데 곽세라의 책 ‘나의 소원은, 나였다’를 읽다가 “정말 마지막 순간이 오면, 마음은 가보지 못한 길을 가려 들지 않는다. 대신 추억 속 그 길을 다시 걷고 싶어 하고 내가 알던 이들을 한 번 더 보고파 한다”라는 문장을 읽었다. 지름 21센티미터의 암을 선고받은 저자가 벼랑 끝에서 떠올린 건 버킷 리스트가 아니라 앙코르 리스트였다. 죽음이 비통..

‘자유의 여신상’ 받침대에 새겨진 시 [고두현의 아침 시편]

한국경제  2025. 3. 21. 00:04     새로운 거상(巨像)                        엠마 라자러스 두 개의 땅을 정복자의 발로 밟고 있는 저 그리스의 청동 거인과 달리 여기 파도에 씻기고, 석양에 빛나는 관문에 횃불을 든 승리의 여신이 서게 되리라. 그 횃불은 번개를 품고, 그녀의 이름은 망명자의 어머니. 횃불 든 손은  온 세계를 환영의 빛으로 밝히고 온화한 눈은 다리로 이어진 두 항구 도시를 보네. “오랜 대지여, 너의 옛 영광을 간직하라!” 그러면서 굳은 입술로 그녀는 외치리라.  “나에게 보내다오. 너의 지치고, 가난하고,  자유롭게 숨쉬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을, 풍요로운 해안가의 가련한 사람들을, 폭풍우에 시달려 갈 곳 없는 사람들을, 나 황금 문 곁에서 등불을 높이 ..

[김진영의 자작나무 숲] 죄와 벌

조선일보  2025. 3. 18. 00:02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다시 읽는다. 널리 알려진 소설의 내용을 소개하자면, 가난 때문에 학업을 중단한 법학도 라스콜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한다. 사회에 아무 이득도 못 되면서 가난한 사람 피만 빠는 이[蝨] 같은 존재를 없애 그 돈으로 다수를 구한다는 ‘정의로운’ 목적에서다. 그러나 그는 전당포 주인을 죽이고도 정작 돈은 취하지 않는다. 히브리어 ‘죄’는 ‘하나님 뜻’을 절대 기준 삼은 개념어고, 죄(罪)라는 한자는 ‘그릇된 일을 하여 법망에 걸리다’의 의미를 지녔다 한다. 러시아어 ‘죄(prestuplenie)’에는 ‘넘어서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히브리어나 한자에 비해 관념적이고 표상적이다. 죄는 근본적으로 선(線)을 ‘넘는’ 행위다. 그 ‘선..

[백영옥의 말과 글] [397] 초연결 시대의 단절

조선일보  2025. 3. 15. 00:05 아파트 단지를 걷다 보면 아이보다 지켜보는 어른이 많은 놀이터를 쉽게 발견한다. 아이가 싸우거나 다칠 때를 대비해 만반의 준비 중인 어른들이다. 미국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의 ‘불안 세대’를 읽으며 나는 이 흔한 동네 풍경을 떠올렸다. ‘불안 세대’는 현실 세계의 ‘과잉 보호’와 온라인 세계의 ‘과소 보호’가 어떻게 아이들을 병들게 하는지 분석한다. 놀이터에서 그네를 먼저 타고 싶었던 아이가 순서를 뺏기자 울면서 아빠를 바라본다. 아빠가 달려간다. 갈등을 봉합하고 놀이 순서를 다시 정하고 화해하는 데 걸린 시간은 5분. 언뜻 문제없어 보이는 이 장면에 집중 육아의 병폐가 숨어 있다. 자율적인 놀이를 통해 호기심과 독립심을 키우고, 또래와 겪는 갈등을 해결하..

[백영옥의 말과 글] [396] 기도에 대하여

조선일보  2025. 3. 7. 23:50 어릴 적, 기도 중간에 실눈을 뜨고 기도하는 사람 얼굴을 보는 습관이 있었다. 쏟아지는 소망의 내용이 길수록 사람은 저마다 절박함이 깊구나 싶어 가슴이 울렁였다. 그때 내 기도는 주로 원하는 물건 목록이었다. 간절함을 담아 기도하면 이루어진다고 믿은 어린 신앙은 점점 물건뿐 아니라,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있게 해달라는 소망으로 이어졌다. 직장인이 되자 기도 시간만큼 한탄의 목록도 길어졌다. 문학 공모에서 떨어지지 않았다면, IMF만 없었다면,....그러니 지금까지 내 간절한 기도의 내용은 모두 틀린 것이었다.  이제 내 힘으로 어쩔 수 없을 때 기도한다. 한없이 추락하던 어느 날엔 위로를 줄 단어를 찾기 위해 기도한다. 기도의 말이 하늘에 닿기 전, 우선 내 귀..

[백영옥의 말과 글] [395] 불안의 평등

조선일보  2025. 3. 1. 00:06 1점 차이로 시험에 떨어진다면 어떨까. 억울할 것이다. 갖은 노력에도 장기 수험생이 되면 억울함은 불안으로 변한다. 그렇다면 1점 차로 합격한 학생은 행복하기만 할까. 한 의과대학 상담 소장이었던 지인에게 나는 의대생들의 불안과 우울에 따른 다양한 고통에 대해 들었다.....기대에 부응하지 못할지도 모른단 불안이 이 세대에 내면화된 것이다. 앤 피터슨의 책 ‘요즘 애들’에는 끝없는 불안에 시달리는 MZ세대를 보여주며 “번아웃은 이제 우리 시대의 상태”라고 정의한다. 열심히 일해야 하지만 워라밸을 고수하고, 아이의 마음을 잘 읽어주지만 헬리콥터 부모가 돼선 안 되며, 소셜 미디어로 자기 브랜딩을 하지만 진정성 있는 삶을 사는 등 이 세대가 서로 모순된 일을 동시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