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敎養·提言.思考 1406

[백영옥의 말과 글] [390] 더킷 리스트

조선일보  2025. 1. 24. 23:55 수지 홉킨스의 책 ‘내가 죽은 뒤에 네가 해야 할 일들’을 읽다가 ‘더킷 리스트(duck it list)’라는 단어를 봤다. 더킷 리스트는 살면서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인데, 저자는 딸에게 싫어하는 일을 나열하고 가장 싫은 두 가지를 당장 중단하라고 말한다. 자신은 ‘매일 체중 재기와 다리털 면도하기’를 삶에서 지웠다고 고백하면서 말이다. 버킷 리스트가 채우기라면 더킷 리스트는 비우기에 가까운 셈이다. 문득 내가 살면서 가장 하기 싫은 일이 뭐가 있을까 생각했다.....물건도 그렇다. 추억 때문에, 언젠가 쓰게 될까 봐 쌓아둔 물건을 애써 비우는 것 역시 그것을 찾느라 허비하는 지금의 시간이 과거나 미래보다 귀하기 때문이다....안 쓰는 물건에 공간을 빼앗..

[백영옥의 말과 글] [389] 하고 싶은 일, 해야 하는 일

조선일보  2025. 1. 17. 23:50 살면서 흔한 질문 중 하나가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의 방황이다. 심야 라디오를 진행할 때 특히 이런 사연이 많았는데, 고민 끝에 내가 내린 답은 ‘먼저 해야 할 일’을 하고 ‘나중에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것이었다. 해야 하는 일은 매일. 하고 싶은 일은 가끔. 그것이 내가 얻은 생활의 지혜다. 사람들의 생각처럼 하고 싶은 일만 하면 행복할까. 일본의 다카마쓰 지방을 여행한 적이 있다. 좋아하던 우동을 실컷 먹는 게 목적이었다....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가 방문했다던 우동집까지 찾아 종일 우동만 먹은 지 사흘째, 우동 국물이 느끼해 고역이 따로 없었다. 다른 이야기도 있다. 한 예술가와 술자리를 한 적이 있는데 그는 한 가지 소재에 천착해..

[왕태석의 빛으로 쓴 편지] 새해 소망의 벽, 광화문의 밤을 수놓다

한국일보  2025. 1. 13. 04:31 새해 첫 출근길, 차가운 새벽 공기를 가르며 광화문광장을 걷다 예상치 못한 풍경과 마주했다.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벽 하나가 나를 불러 세웠다. 가까이 다가가니 ‘wish light’라는 글귀와 함께 ‘당신의 소원이 서울의 별이 됩니다’라는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벽에는 별똥별처럼 빛나는 구슬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 안에는 광화문을 찾은 시민들이 정성껏 적은 소망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마치 작은 우주를 보는 듯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가족에 대한 애정이었다. ‘가족 건강’ ‘우리 아기가 건강하게 태어나길’ ‘가족의 행복’ 등 따뜻한 메시지들이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청춘들의 풋풋한 꿈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좋..

[백영옥의 말과 글] [388] 결코 뻔하지 않은 이야기

조선일보 2025.01.11. 00:16 차인표의 소설을 읽다가, 연기하던 배우를 소설 쓰는 작가로 만든 비결이 궁금해 그의 강연을 찾아본 적이 있다. 그는 매일 일기 쓰기, 운동하기, 금주, 금연 같은 습관을 말했다. 어찌 보면 뻔한 얘기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에 느닷없이 크리스마스에 그의 집 벨을 누른 박찬호 선수가 등장한다. 한창때의 스포츠 스타가 그의 집 거실에서 한 행동은 뜻밖이었다. 모두가 술과 음식을 즐기는 흥겨운 크리스마스에 두 남자는 거실에 앉아 명상했다. 그는 “성공하려면 남들이 다 누리는 것 중, 반드시 누리지 않는 게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스티브 잡스도 “내가 이룬 것만큼 내가 하지 않은 것도 자랑스럽다”는 말을 했다. 전문가들의 강연을 듣다 보면 결국 잘 자라, 좋은 음식 먹어..

[백영옥의 말과 글] [387] 나만의 활 쏘는 법

조선일보  2025. 1. 3. 23:50 흔히 “세월이 쏜살같이 지나갔다”고 말한다. 한번 쏜 화살은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올림픽 경기에서 양궁 경기를 자주 보는데, 한 양궁 해설자의 말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지고 있던 선수들에게 아직 기회가 있음을 강조하며 “바람은 불다, 안 불다 하기 때문에 자기 활을 쏴야 한다!”고 격려하듯 외치던 말이다. 눈에 비슷해 보여도 선수들의 화살 길이는 제각각이라고 한다. 선수들의 팔 길이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좋은 화살도 자기 것이 아니면 쓸모없고, 남을 흉내 낼 게 아니라 자기 활을 쏘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양궁을 보며 내가 배운 또 한 가지는 과녁에 명중시키려면 목표보다 조금 더 높은 곳을 겨냥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내가 예..

[백영옥의 말과 글] [386] 한 해를 정리하며

조선일보  2024. 12. 28. 00:13 글을 쓰다 보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노동요로 정훈희의 ‘안개’를 듣다가 지금 시국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바람이여 안개를 거둬가 다오”라는 노랫말처럼 안갯속 풍경이 사라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연말이면 반복하는 일 몇 가지를 실천했다. 새 다이어리 사기, 다음 해의 습관 계획 세우기, 전화번호부 정리하기 등이다. 연말에는 다음 해에 만들고 싶은 새로운 습관을 정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기, 정리하기 등 많은 실패에도 루틴을 반복하는 건 계획을 적는 것만으로 절반은 성공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경우, 이런 심리적 만족감이 늘 결심 과잉을 만들었다.....그렇게 실패가 계속 반복되면서 실패보다 훨씬 나쁜 측면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

[백영옥의 말과 글] [385] 완벽주의라는 덫

조선일보  2024. 12. 20. 23:50 고2까지 전교 1등을 하던 남자가 한 번의 시험 때문에 내신이 추락한 후, 시험 공포증으로 사회 진출을 못 했다는 사연을 들었다. 글자 하나만 틀려도 새 제품을 사느라 수십 권의 쓰다 만 다이어리를 갖게 된 여자의 사연도 들었다. 이들은 자신을 완벽주의자라고 설명했다. 그들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는 건 완벽주의에 대한 우리의 관념이 작은 것까지 신경 써 최상의 결과를 만드는 전문가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청결 완벽주의자라고 소개한 남자의 방은 의외였다. 창틀 먼지, 손톱 위 거스러미 하나 참을 수 없다던 남자는 왜 떡진 머리로 쓰레기 방에 고립됐을까. 그는 책상 하나를 닦기도 전에 이미 지쳤다. 방 안의 먼지와 쓰레기를 완벽히 치울 자신이 없어 포기했..

[백영옥의 말과 글] [384] 왕관의 무게

조선일보 2024. 12. 13. 23:50 “누구에게나 때가 있다.” 판촉용으로 나누어주던 연두색 때수건에 새겨진 문구를 봤다. 사람에겐 피할 수 없는 두 가지 ‘때’가 있다. 하나는 시간, 다른 하나는 더러움을 의미하는 때다. 삶을 시간 여행으로 정의하면 우리는 이 두 가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사람은 살면서 수많은 선택을 한다. 후회막심의 순간도 있지만 나라는 존재는 이전에 선택한 모든 것의 총합이며, 어른은 자신의 선택을 인정하고 책임지는 사람이다. 사람에게는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가 있다. 하지만 ‘때’를 안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좋은 때에 좋은 사람이 되긴 쉽다. 본성은 고난에 빠졌을 때, 고스란히 드러난다. 워런 버핏이 “물이 빠지고 나서야 누가 발가벗고 수영했는지 알게 된다”고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