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敎養·提言.思考 1425

[백영옥의 말과 글] [407] 효율성에 대하여

조선일보 2025. 5. 24. 00:29 처음 로봇 청소기를 샀을 때, 청소 걱정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외출 전 작동시키면 충전까지 알아서 하니 시간 효율의 혁신 같았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점점 청소기를 손수 돌리는 시간이 늘었다. 보이지 않는 구석까지 먼지를 빨아들이고 깨끗해지는 걸 내 눈으로 확인해야 시원했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의 취미는 설거지인데, 더러운 그릇을 닦을 때마다 업무로 복잡했던 어수선한 마음이 말끔해지기 때문이란다. 그가 설거지를 움직이는 명상이라고 부른 이유다. 효율적 삶의 가장 큰 부작용은 현재를 미래의 목표를 위한 단계로만 인식하는 것이다. 사립초, 국제중, 특목고 진학이 명문대를 위한 것으로 압축되고, 명문대 입학이 취업을 위한 과정으로 의미가 한정되는 것처..

[백영옥의 말과 글] [406] 관점에 대하여

조선일보 2025. 5. 16. 23:50 갑자기 날씨가 변해서 비를 맞게 되는 경우가 있다. 비를 피해 카페의 2층에 앉아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을 보았다. 문득 산속 홀로 서 있는 웅장한 소나무를 볼 때, 화가와 목수의 시선이 다르다는 스님의 얘기가 떠올랐다. 그림의 소재인 멋진 노송을 무참히 베는 목수가 화가의 눈에는 ‘악’이지만, 목수에겐 튼튼한 집의 기둥이 되는 것이 ‘선’이니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살다 보면 관점의 차이로 가까웠던 사이가 소원해지는 경우가 있다. 최근에는 정치·경제·젠더·세대·환경 등 다양한 이유로 관점이 달라 심지어 서로를 증오하기도 한다. 그러나 익명성 뒤에 숨는 온라인과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SNS와 유튜브에서는 동종 교배가 일어날 확률이 높다...

[백영옥의 말과 글] [405] 내가 좋아하는 것

조선일보 2025. 5. 10. 00:20 사람들이 가장 잊지 못하는 것은 무엇일까. 가져보지 못한, 받아보지 못한 어떤 것에 대한 회한이다. 여기에 후회보다 무거운 ‘회한’이란 말을 쓰는 건 해본 것보다 해보지 못한 것을 오래 기억하는 우리의 심리 구조 때문이다. 심리학에는 ‘재양육’이라는 말이 있다. 내면의 상처받은 아이를 불러내 다시 양육하는 것인데,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을 스스로 채우는 것이다....부모도 부모가 처음이기에 우리 중 누구도 100%의 사랑을 받아본 적 없다. 자식도 자식이 처음이듯 인생은 편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딘가 모자라고 부족한 우리를 채울 사람은 그러므로 결국 나 자신뿐이다. 우울할 때, ‘My favorite things’를 부른다. 영화 ‘사운드 ..

[백영옥의 말과 글] [403] 꽃과 잎새

조선일보 2025. 4. 26. 00:34 벚꽃이 비처럼 내리던 날 공원의 벤치에 앉아서 프러포즈하는 연인을 보았다. 오래전 보았던 영화가 떠올랐다. 각자의 연인이 있는 두 남녀가 붐비는 뉴욕의 백화점에서 딱 하나 남은 장갑을 동시에 잡은 채, 한눈에 반해 서로를 찾아 헤매는 이야기. 반나절을 함께 보낸 후, 끌림과 죄책감 사이에서 여자는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낸다. 그녀는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은 후 남자에게 책을 헌책방에 팔겠다고 말한다. 책이 돌고 돌아 당신에게 오면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세렌디피티’는 우연한 발견이나 행운을 뜻한다. 결국 그들은 서로를 그리워하다가 각자의 연인과 헤어진다. 남자는 이후 7년이나 책을 찾아 헤매는데 엉뚱하게 이 책을 누군가에게 우연..

[백영옥의 말과 글] [402] 이명이 찾아왔을 때

조선일보 2025. 4. 18. 23:50 이명(耳鳴) 때문에 청력을 검사했다. 청력에 문제가 없다는 진단을 받고 답답함에 한숨을 쉬었더니, 의사가 백색 소음이 수면에 도움이 될 거라며 몇 가지 소리를 추천했다....활동하는 낮에는 크게 느끼지 못하다가, 자려고 누우면 선명해지는 이명은 높낮이와 볼륨을 달리하며 나를 괴롭혔다. 추천받은 빗소리·비행기 소음, 극저음 싱잉볼 등 다양한 백색 소음을 들었다. 실제 눈을 감고 누우면 2만피트 상공의 밤하늘을 날거나, 오리엔탈 특급열차에 올라탄 기분이 들었다. 이코노미 중간석이 아닌, 일등석에 앉아 풍경을 보는 것 같은 안락함은 덤이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와 매미 소리를 틀고 잔 어느 밤에는 잊혔던 어린 기억이 떠올라 배시시 웃었다. 의사는 이명에 가장 ..

[백영옥의 말과 글] [401] 반추와 복기의 차이

조선일보  2025. 4. 12. 00:16 성적, 승진은 물론이고 가위바위보에 져도 화가 치밀고, 남들이 못 사는 한정판은 꼭 사야 만족한다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성공하고 쟁취한 순간은 짜릿하지만 곧 허탈해지고, 졌을 때는 상황을 반추하며 뒤척이다 밤을 새기도 한다. 그들의 반추는 언뜻 바둑의 복기를 연상시킨다. 문득 조훈현 9단의 “이기는 기쁨에 비해 지는 고통이 너무 커서 결국 이기기 위해 복기한다”는 인터뷰가 떠올랐다. 반추와 복기의 차이는 무엇인가. 반추는 이미 끝난 나쁜 상황을 곱씹고 곱씹는 것으로 심리학자들이 최악의 감정적 습관이라 부르는 것이다.....반추와 달리 복기는 ‘이기든 지든’ 무조건 한다. 복기의 기능은 승리와 패배 모두에서 배운다는 대원칙에 있다....아플수록 더 철저히 복..

[백영옥의 말과 글] [400] 내 인생 소풍이었지

조선일보  2025. 4. 4. 23:50 어떤 남자와 결혼해야 하느냐에 대한 답을 찾았다. ‘폭싹 속았수다’의 양관식이 같은 사람이다. ‘응답하라 1988’이나 ‘슬기로운 의사 생활’처럼 이 드라마는 판타지물에 가깝다. 하지만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 건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이상적 현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철학자 ‘발터 베냐민’은 짝사랑 전문가였다. 그는 ‘어떤 사람을 아는 사람은 희망 없이 그를 사랑하는 사람뿐’이라고 말했다. 첫사랑 애순이가 자신을 보든 말든 시장에서 대신 “양배추 달아요!”를 외치던 연인 관식이 그런 사람이다....누군가를 기대 없이 사랑한다는 건 빛과 어둠 모두를 품는다는 뜻이다. 사랑은 소중해서 쉽게 집착과 욕심으로 부패하기 때문이다.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문장을 나는 이승우..

[백영옥의 말과 글] [399] 불안 사회

조선일보  2025. 3. 29. 00:14 채식주의자 친구가 있다. 그녀가 비건이 된 건 실직 후, 사람에게 갈 곳 없던 마음이 동물에 대한 사랑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중학생 때 이민을 간 한 친구는 언어와 문화 차이 때문에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했는데, 그때 그녀를 지켜준 건 방과 후 특별활동이었던 수영이었다. 도망가고 싶을 때마다 물살을 가르며 마음을 다잡았다는 것이다.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건 불행이 아니다. ‘아직 확정되지 않은 불행’이다. 예측 불가능성은 인류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다. 일관되지 않은 불안정한 부모의 애정이 아이의 내면을 망친다는 건 심리학계의 정설이다. 저출산의 기저에도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있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는 지금 ‘일한다’는 곧 ‘새로 배운다’는 의미와 동일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