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敎養·提言.思考 1357

[백영옥의 말과 글] [353] 가면

조선일보  2024. 5. 10. 23:52 노예의 삶을 이야기하는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한 청중의 질문이 기억에 남는데 몇 년 동안 자신에게 아낌없이 기술을 전수해주던 사장이 암에 걸려 치료 중이라 이직을 고민 중이라는 사연이었다. 그는 자신이 이직하면 직원이 몇 없는 회사가 망하진 않을까 괴롭다고 했다. 놀라운 건 강사의 호통이었다. 노예가 왜 주인 걱정을 하냐는 것이다. 세상을 갑과 을로만 보는 그의 시각에 놀라 아직까지 잔상에 남는다. 술에 취해 귀가하는 후배의 안전을 걱정해 택시 번호판을 휴대폰으로 찍은 선배가 있다. 또 한 선배는 회식 자리의 신입에게 외모 품평에 술 따르기를 강요한 상사를 제지하며 미투를 경고했다. 대부분은 이들의 행동에서 선의를 느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직장 내..

104세 철학자 김형석 “尹대통령, 다른 사람 이야기 들어야”

서울신문  2024. 5. 10. 01:21 “자유민주주의 뒷받침 지식 없어 다방면 학자들과 티타임 가지길 건강 비결은 젊은 사람과의 만남 ‘성장’했던 65~70세 때 가장 행복” “윤석열 대통령은 함께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을 더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올해 104세 ‘한국 최고령 철학자’로 통하는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가 윤 대통령에게 건넨 조언이다. 김 명예교수는 9일 서울 중구 한 식당에서 열린 ‘김형석, 백 년의 지혜’(북이십일)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윤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를 뒷받침하는 역사적인 지식을 갖추지 못했다”며 윤 대통령이 독선에 빠져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윤 대통령이 말하면 장관들도 모두 옳다고 하며 따라간다”며 “윤 대통령은 장관이 아닌 다방면의 학자들을 일주일에 한..

[백영옥의 말과 글] [352] 듣기, 읽기, 쓰기

조선일보  2024. 5. 4. 00:31 글쓰기 전반을 책으로 쓰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을 때가 있다. 거절의 이유는 방법론을 얘기하기엔 민망할 정도로 ‘그냥’ 쓰기 때문이다. 정해진 트랙을 도는 마라토너처럼 아침이면 의자에 앉아 그냥 쓴다. 지금도 그냥 할 수 있는 힘을 키우기까지가 프로의 관건이라 믿는다. 쓰면서 스스로에게 종종 되묻는 말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쓰고 싶은지 ‘남이 듣고 싶은 얘기’를 쓰고 싶은지에 대한 구분이다. 이 차이 역시 중요한데 그 사이 어딘가에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쓰기에 대한 다른 시각을 더 얘기하자면, 글을 잘 쓰는 데 필요한 가장 중요한 자질은 쓰기가 아닌 ‘듣기와 읽기’에 있다. 내가 쓴 대부분의 글은 내가 귀 기울여 듣거나 읽은 것이다. 물론..

‘문화시설’로 변경된 송현동 부지… 이승만 기념관 건립도 가능해지나

서울신문  2024. 5. 2. 05:01 공원 조성 등 지구단위계획 변경 서울시는 “이건희 기증관 위한 것” 서울시가 종로구 송현동 부지에 대해 이건희 기증관과 주차장 조성 등을 위한 ‘북촌 지구단위계획 결정변경안’을 수정 가결했다. 변경안에는 문화시설이 들어서는 내용이 포함돼 이건희 기증관과 함께 이승만 기념관 건립도 가능하게 됐다. 시는 지난달 30일 제5차 도시·건축공동위를 개최하고 ‘북촌 지구단위계획 결정(변경)(안)’을 수정 가결했다고 1일 밝혔다. 이번 변경안에는 송현동 부지(종로구 송현동 48-9 일대, 3만 6903.3㎡)의 옛 미 대사관 직원 숙소 특별계획구역을 폐지하고 문화공원, 주차장 및 문화시설로 결정하는 내용이 담겼다. 이건희 기증관이 들어서기로 한 동쪽 부지가 문화시설로 지정됐..

[백영옥의 말과 글] [351] 성장통과 트라우마

조선일보  2024. 4. 27. 00:02 어린이 축구 교실에 갔다가 다친 아이를 보고 놀란 엄마가 코치를 추궁하는 걸 본 적이 있다.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멀리 있던 나도 들을 수 있었는데, 핏대 높이는 엄마 앞에서 정작 아이는 남 일 보듯 무기력해 보였다. 이 얘길 심리 상담사인 친구에게 말했더니 요즘 열 살 전후의 아이들도 무기력증으로 찾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말했다. 그녀에게서 맞은 쪽 아이 편만 들어줘 자신의 아이에게 트라우마가 생기면 책임지라며 괴롭히는 학부모 때문에 고민인 교사 내담자 얘기도 들었다. 때린 아이에게도 사정이 있는데 마음을 읽어주지 않아 자신의 아이도 상처받았다는 것이다. 남들은 적반하장이라 읽고 본인은 정당방위라 쓰는 경우다. 알베르 카뮈는 “인간의 도덕과 의무에 대해 ..

[ESF2024]“학벌주의 만연한 韓…성적 스트레스 영향 끼쳤을수도”

이데일리 2024. 4. 22. 05:02 [1- ②]이스라엘 인구학자 알렉스 와인랩 인터뷰 이스라엘, 성적보다 조직 결속력 더 중시 연례캠핑 하이킹 등 외부활동 적극 권장 인구통계학자의 관점에서 한국은 매우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다. 부동산 가격 폭등과 청년 일자리 부족 등 각종 사회적 난제는 한국만의 특수한 현상은 아닐진대 유독 합계출산율은 다른 선진국에 비해 과도하게 낮은 수준이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인구통계학자 알렉스 와인랩 이스라엘 사회정책연구소 선임연구원의 눈에도 한국은 이상한 나라로 비친 것 같았다. 그는 인터뷰자리에서 한국인 스스로는 어디에서 저출산의 원인을 찾고 있는지, ‘한국인에게 출산 계획을 묻는 것은 무례한 질문인지, 젊은 남녀 간 만남 자체가 줄어든다고 하는데 실제 그런지 기자에게 ..

[백영옥의 말과 글] [350] 우정은 왜 그렇게 어려운가

조선일보 2024. 4. 20. 03:03 인터넷 뉴스에 나는 축의금을 이만큼 했는데 돌아온 축의금은 요만큼이라 고민 중이라는 기사가 가끔 눈에 띈다. 기사 밑에는 ‘손절이 답’이라는 댓글도 꽤 많다. ‘우정은 왜 그렇게 어려운가!’라는 제목의 칼럼을 읽다가 우리가 친구라고 믿는 관계의 절반 정도만 두 사람 모두가 서로를 친구로 생각한다는 문장을 봤다. 생각보다 우정이 일방적이란 뜻이다. 친구의 재능이 아까워 관계자에게 자기가 출연하는 작품에 친구를 추천한 남자가 술 취한 친구에게 “네가 나를 동료로 생각해 경쟁하려 들지 않고 만만히 보기 때문에 나를 옆에 두려는 거잖아!” 하는 말을 들었다면 어떻겠는가. 내 호의가 너의 상처로 둔갑한다면 말이다. 친구가 되기보다 어려운 건 친구 관계를 오래 유지하는 것..

성관계마다 같이 잔 남자를 죽였다···영화보다 지독한 자연계 현실[생색(生色)]

매일경제 2024. 4. 14. 06:12 [생색-25] 금발에 파란 눈, 큰 키에 늘씬한 몸매. 꿈에 그리던 이성과의 하룻밤으로 그는 흥분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 갈망하던 그녀와 몸을 섞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분위기는 무르익었고 두 사람은 입을 맞추며 침대로 이동합니다. 황홀경에 젖어있을 때 쯤, 어쩐지 그녀의 표정에서 수상함이 느껴집니다. 나체의 무방비 상태인 남자를 먹잇감 보듯이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안한 예감은 언제나 현실이 되는 법. 완벽한 이상형이었던 여자는 송곳으로 남자를 찔러 살해합니다. 최고의 순간에 찾아온 최악의 불행이었습니다. 영화 ‘원초적 본능’은 잠자리에서 남성을 죽이는 한 여자 살인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샤론스톤의 미모와 완벽한 연기 덕분인지 영화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