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氣칼럼니스트/송호근의 세사필담 18

[송호근의 세사필담] 20세기에 이런 나라가 없었다

중앙일보  2024. 8. 6. 00:39 연해주와 간도에 묻힌 독립투쟁 독재와 항쟁 속 이룩한 자립투쟁 누구도 흉내 못 낼 한국의 역투 권력투쟁 정치가 망칠까 두려워 필자는 최근 연해주 한인들 얘기에 푹 빠져 지냈다. 1860년대부터 두만강을 건넌 조선인들은 연추 지역을 거쳐 연해주 전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3·1운동이 일어난 시점에 연해주엔 10만 이주민이 살았다. 간도 이주민을 합하면 30만 명에 달했다. 이들은 척박한 땅을 개간하고 가축을 치면서 총을 들었다. 궁핍했던 이들은 자식들을 독립의용대에 선뜻 내줬다. 독립군은 간도에 4000명, 연해주에 5000명을 헤아렸다.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독립부대는 여순 반도와 연해주 해안을 점령한 일본군 5개 사단과 대적했다. 나라를 잃은 지 10년,..

[송호근의 세사필담] 이토록 잔인한 여름

중앙일보  2024. 7. 9. 00:34 자리 안 가리는 야당의 탄핵 남발 국가 존망을 덮치는 급발진 차량 용산 포격 매달리는 야당 탱크들 의료와 민생 붕괴는 안중에 없어 여름은 온갖 살아있는 것들이 응축한 힘을 한껏 분출하는 계절이다....폭우가 하천을 범람하고 도심을 침수시켜도 일 년 묵은 때와 얼룩을 씻어주리라 믿는다. 장마가 뒤엉킨 머릿속을 헹궈 후련한 시간을 열 것이다. 그래서 여름은 시련과 만족의 교차로다. 그러나 올해 이런 여름은 없다. 잔인하다. 미래를 기약했던 리튬전지가 애꿎은 생명을 앗아갈 줄 상상도 못 했다....청운의 꿈을 가꾸던 모범 직장인들을 자동차가 덮쳤다. 애달파 눈물도 차마 흘리지 못했다. 저녁 무렵 직장인들에게 귀갓길은 사주경계의 피곤한 시간이 됐다. 아이스커피를 들이켜..

[송호근의 세사필담] 이대로 괜찮은 겁니까?

중앙일보  2024. 5. 14. 00:38 미국·일본 속전속결 반도체 굴기 느릿한 한국의 반도체 공장 설립 역사적·인류학적 땅이라 어려움 국회와 정치권이 난관 뚫어줘야 ‘미국 제조업이 다시 돌아왔다. 시러큐스가 미국의 위대한 복귀 이야기를 쓰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뉴욕주 북쪽 시골 벌판에서 이렇게 외쳤다(조선일보 4월 26일자). 괜한 소리가 아니다. 2년 전 바이든 정부가 공언한 반도체 패권 전략은 텍사스와 애리조나 오지에 글로벌 기업을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막대한 보조금과 주정부의 후원을 받은 삼성과 TSMC가 첨단공장 가동을 앞두고 있다. D램 최강자 한국이 40년 전 반도체에 눈을 뜬 것은 요행이었을까. 우주항공, 자율주행차, 군사 장비, 그리고 AI가 반도체를 먹는 향유고래임을..

[송호근의 세사필담] 강남스타일!

중앙일보 2024. 2. 20. 00:42 고종도 이승만도 독고다이 기질 독선의 유혹은 파산 아니면 감옥 석열스타일 유효기간 지났는데 반전 없는 용산으론 역전 난망해 ‘인생은 독고다이(특공대)!’. 국민 스타 이효리가 모교 졸업식에서 작정하고 한 말이다. 굳건히 견디고 자신을 믿으라는 충고다. 얼마나 험한 가시밭이었으면 이런 내심을 비췄을까. 자기 스타일을 고집해야 하는 예인(藝人)에게는 약인데, 독선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 정치가에게는 독(毒)이다. 요즘 인기몰이 중인 ‘건국전쟁’의 주인공 이승만도 그랬다. 패권국 미국과 감히 담판을 해내는 약소국 지도자가 누가 있었을까. 단정 수립 아니면 북한 정권에 먹혔을 가능성이 컸다. 토지개혁은 더러 알려졌지만, 이승만이 밀어붙인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생소할 것이다...

[송호근의 세사필담] 개에 대한 명상

중앙일보 2024. 1. 23. 00:47 개가 보기에도 한심한 정치판 개식용 금지법으로 연정 선보여 전직 대통령 묘소에 머리 숙인들 물갈이 빅텐트 이뤄낼지 못 믿어 ‘개 식용 금지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자 외신들이 난리가 났다. 미국 CNN은 방송 도중 속보를 내보냈고, 주요 통신사들도 호들갑을 떨었다. 네팔, 필리핀, 인도네시아처럼 개를 먹는 나라가 더러 있음에도 이렇게 조명을 받는 건 한국이 G10 멤버이기 때문일 것이다. ‘드디어 후진국을 벗어났다.’ 월스트리트저널의 이런 표현에는 문화적 경멸감도 읽힌다. 조선 최초의 어류도감을 만들고 있던 정약전 선생이 산개를 정말 먹었을까만, ‘개’라면 당대의 시대적 고통을 앓는 몸에 들어가 보양이 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오죽했으면 작가 김훈이 스스로 ..

[송호근의 세사필담] 북콘서트의 계절

중앙일보 2023. 11. 28. 00:51 정의로 치장한 정치인 북콘서트 외설과 비루한 표현의 난장판 국민 공헌과 시민 역할을 가로챈 말 고수들 가려 낙선운동 펼쳐야 글로 생계를 잇는 전업 작가는 자신의 저서가 부끄럽다. 혹시 투박한 감정이 들키지는 않았는지 노심초사다. 긴장감이 역력한 저자를 만나는 자리, 북카페에서 조촐하게 열리는 독자와의 대화는 정겹다. 그런데 도시를 옮겨 다니며 요란한 북콘서트를 즐기는 사람들에겐 특별한 목적이 있다. 과시와 변명, 팬덤 관리, 공론 왜곡. 정치인들의 레퍼토리다. 86세대의 맏형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가 테이프를 끊었다. ‘별것도 아닌’ 돈봉투 건으로 자신과 주변을 못살게 구는 검찰을 겨냥한 분노와 적개심이 적란운처럼 피어올랐다. 저서 제목도 ‘선전포고’였다.....

[송호근의 세사필담] 동학이 항일투쟁이라고?

중앙일보 2023. 10. 3. 00:56 정치적 의도로 역사 덧칠은 금물 동학법 개정안은 동학 본질 이탈 제폭구민 척왜양 투쟁 불사했지만 사민평등 자각한 종교개혁이 본질 줏대 없다는 뜻의 좌고우면이 꼭 필요할 때가 있다. 정치권이 역사적 사건을 평가할 경우다. 야당은 홍범도 논란이 가라앉기도 전에 이번에는 동학(東學)을 불러들였다. 국회 상임위 소위에서 강행 처리된 동학법 개정안은 직선적이고 거칠다. 1894년 동학농민봉기 참여자를 ‘독립유공자’로 대우하고 ‘고손(高孫)’까지 교육·취업·의료 혜택을 부여한다는 것. “일제의 침략에 맞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기에” 독립유공자, 130년 전 일이라 고손이라 했다. 족보를 뒤지고 고조부 행적을 찾아 나서야 할 판이다. 1894년 봄 백산 결의문엔 사람존중, ..

[송호근의 세사필담] OC목장의 결투

중앙일보 2023. 9. 5. 00:56 해양과 대륙 간 진자운동 역사 출구없는 이분법 격돌정치 초래 이념 도리깨로 역사를 타작하면 한국은 순백의 초원으로 나갈까 가을비가 폭염을 멀리 보냈다. 곧 추석이 올 것이다. 오래전 추석엔 극장가가 붐볐다. ‘미워도 다시 한번’ 같은 애정극, ‘OK목장의 결투’ 같은 서부극이 인기였다. 필자는 서부활극파였다. 악당이 총에 맞는 순간의 짜릿함이라니. 석양 속으로 사라지는 총잡이의 고독에 매료됐다. 불과 몇 초의 결투로 OK목장은 평정을 되찾는다. 소와 말이 사이좋게 풀을 뜯어 먹을 것이다. 계절이 바뀌어도 절대 안 바뀌는 것들이 있다. 머리와 가슴을 짓이기는 이분법 격돌정치. 국민도 진영화된 격투기에서 타협은 배신, 휴전은 굴종이다. 문패가 5년마다 바뀐다니 팬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