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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277] 사랑과 폭력의 경계

조선일보  2025. 3. 18. 23:56- 내 나이가 어린 것과는 상관없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나의 정신세계를 사랑한다고, 나에게 천재 수준의 감수성이 있고 글쓰기에 특출한 재능이 있다고, 나와는 얘기가 통한다고,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다고, 내 마음 깊은 곳에 어두운 로맨스가 도사리고 있는데, 자기 내면에도 똑같은 감성이 있다고, 내가 나타날 때까지 어느 누구도 그 어두운 내면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내 운명이겠지.” 그가 말했다. “마침내 영혼의 짝을 만났는데, 열다섯 살이라니.” - 케이트 엘리자베스 러셀 ‘마이 다크 버네사’ 중에서열다섯 살의 버네사는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녀는 영어 선생님 스트레인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마흔두 살의 그도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녀가 똑똑..

[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276] 인생, 잡을 수 없는 것을 향한 기나긴 여정

조선일보  2025. 3. 5. 00:16그 빌어먹을 유령에 대한 긴 전기를 쓸 수 있을 만큼 정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의 행적을 날짜별로 확인했고, 그가 출몰하는 장소를 알아냈으며 그의 배경 및 거의 완벽한 외양 묘사까지 확보했다. 그가 느꼈을 생각이나 감정, 충격 같은 것도 모두 X선 사진을 찍듯 추적했다. 눈이라도 감으면 그가 그 지나치게 매끈한 얼굴에 정신박약증 환자 같은 웃음을 흘리며 내 앞에 서 있는 모습을 실제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그 남자만은 찾지 못했다. 아무것도 손에 쥔 게 없었다.         - 케네스 피어링 ‘빅 클록’ 중에서출판사 대표 재노스는 내연녀 폴린에게 새로운 남자가 생긴 걸 알고 말다툼 끝에 그녀를 죽인다. 허겁지겁 자신의 흔적을 지우고 현장을 빠져나왔지만..

[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275] 백지에 스며든 먹물처럼

조선일보  2025. 2. 18. 23:58가이는 경찰에 발각될까 봐 불안해한 적이 지금껏 한 번도 없었다. 늘 그의 마음속에 있는 불안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그 불안감이 너무 고통스러워 차라리 법이 개입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양심의 법에 비하면 사회의 법은 느슨하기 짝이 없었다. 법에 다가가 자백할 수도 있었지만, 자백은 단순한 시늉일 뿐 진실을 회피하는 쉬운 길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법의 집행을 받는다 해도, 그건 단순한 제스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열차 안의 낯선 자들’ 중에서가이와 브루노는 열차 안에서 우연히 만나 함께 술을 마셨다. 브루노가 물었다. “혹시 누군가를 죽이고 싶었던 적 있어요?” 그는 다른 남자의 아이를 배고도 인연의 끈을 놓아주..

[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272] 의대 대신 공대 간다는 청년에게 박수를

조선일보  2024. 12. 18. 00:00최우선 과제는 거주용 막사의 캔버스가 온전한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다음으로는 산소 발생기를 점검했다. 산소 발생기가 멈추고 수리할 길이 없다면 나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으니까. 다음엔 대기 조절기를 확인했다. 역시 이상은 없었다. 난방장치, 주요 배터리들, 산소와 질소 저장 탱크들, 물 환원기, 에어 로크 세 개, 조명 시스템, 메인 컴퓨터. 점검해 나갈수록 각각의 시스템이 모두 완벽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자 점점 기분이 나아졌다. - 앤디 위어 ‘마션’ 중에서탐사 중 사고를 당한 마크는 화성에 혼자 남겨진다. 지구에서 구조대가 올 가능성은 낮고 생존 확률도 희박하다. 앤디 위어가 2011년에 발표한 ‘마션’은 화성에 고립된 우주 비행사의 치열한 생존..

[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269] 음식, 생존을 넘어 맛과 멋으로

조선일보  2024. 11. 6. 00:49높은 촛대, 노란 장미, 반짝이는 은식기들, 한 사람 앞에 세 개씩 놓인 포도주잔. 특히 나의 구미를 당기는 건 주방에서 희미하게 풍겨 나오는 고기 굽는 냄새였다. 식사는 버터로 바삭바삭하게 구운 뱅어 요리에 모젤 백포도주를 곁들여 시작됐다. 생선 요리를 다 먹자, 곧 두 번째 요리가 나왔다. 이번에는 큼지막한 로스트비프였다. 그녀가 고기를 마이크 앞에 놓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칼로 얇게 잘라 하녀가 모두에게 돌릴 수 있도록 접시 위에 담았다. - 로알드 달 ‘맛’ 중에서주식중개인 마이크가 만찬을 열었다. 그는 자신이 돈만 좇는 사람이 아니라 예술과 문화에도 조예가 깊은 교양인임을 알리고 싶었다. 화려한 식탁을 자랑하며 포도주에 대한 지식도 늘어놓았다. 특별..

“끔찍해서 못읽겠다”…김창완 ‘채식주의자’ 감상평에 한강이 사과한 이유

조선일보  2024. 10. 15. 11:34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그의 작품을 읽어보려는 독자들이 늘고 있는 가운데, 가수 김창완이 ‘채식주의자’를 읽던 도중 “끔찍해서 안 읽고 싶다”는 반응을 낸 8년 전 영상이 재조명되고 있다. 15일 유튜브에 따르면 ‘KBS 인물사전’ 채널에 지난 11일 올라온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직접 읽어주는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라는 제목의 영상이 인기 급상승 동영상 6위에 올랐다. 이는 2016년 5월 방영된 KBS ‘TV, 책을보다-2016 맨부커상 수상 작가 한강을 만나다’의 일부 장면으로, 이 방송에서 한강은 진행자 김창완과 마주앉아 책을 낭독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김창완은 채식주의자인 아내를 이해할 수 없는 주인공 영혜의 남편 시점에서 서술되..

[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267] 격차 없는 세상은 오지 않아

조선일보  2024. 10. 2. 00:16“동무들! 우리 돼지들이 이기심이나 특권 의식에서 이렇게 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 상당수는 사실 우유와 사과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 자신도 싫어합니다. 동무들, 농장의 모든 관리와 조직이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밤낮으로 여러분의 복지를 위해 고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유를 마시고 사과를 먹는 것도 바로 여러분을 위해서입니다. 우리 돼지들이 임무를 다하지 못하면 존스가 돌아올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존스가 돌아올 것이 틀림없습니다.       - 조지 오웰 ‘동물 농장’ 중에서외모, 재능, 환경의 차이는 개인의 힘이자 사회를 움직이는 중요한 에너지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차이를 격차로 규정하고 그 간격을 없애야 이상적인 사회가 완성된..

[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266] 퇴임 대통령 예우법, 눈꼴사납다

조선일보  2024. 9. 10. 23:54  수정 2024.09.11. 15:15나는 미니밴 옆에 서서 애덤이 경호원과 수행원들에게 둘러싸인 채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들은 재빨리 움직였다. 누가 보면 숲속에 망원 조준기를 겨냥한 암살자가 숨어 있다는 제보라도 받은 모양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이 모두 들어가자 저택의 창마다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잠깐이나마 이곳이 권력의 잔재가 아니라 권력의 진정한 핵심이라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모든 것이 낯설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 로버트 해리스 ‘유령 작가’ 중에서감옥에만 가지 않으면 대통령은 퇴임 후 풍족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다. 재임 연봉의 95%에 달하는 비과세 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