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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272] 의대 대신 공대 간다는 청년에게 박수를

조선일보  2024. 12. 18. 00:00최우선 과제는 거주용 막사의 캔버스가 온전한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다음으로는 산소 발생기를 점검했다. 산소 발생기가 멈추고 수리할 길이 없다면 나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으니까. 다음엔 대기 조절기를 확인했다. 역시 이상은 없었다. 난방장치, 주요 배터리들, 산소와 질소 저장 탱크들, 물 환원기, 에어 로크 세 개, 조명 시스템, 메인 컴퓨터. 점검해 나갈수록 각각의 시스템이 모두 완벽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자 점점 기분이 나아졌다. - 앤디 위어 ‘마션’ 중에서탐사 중 사고를 당한 마크는 화성에 혼자 남겨진다. 지구에서 구조대가 올 가능성은 낮고 생존 확률도 희박하다. 앤디 위어가 2011년에 발표한 ‘마션’은 화성에 고립된 우주 비행사의 치열한 생존..

[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269] 음식, 생존을 넘어 맛과 멋으로

조선일보  2024. 11. 6. 00:49높은 촛대, 노란 장미, 반짝이는 은식기들, 한 사람 앞에 세 개씩 놓인 포도주잔. 특히 나의 구미를 당기는 건 주방에서 희미하게 풍겨 나오는 고기 굽는 냄새였다. 식사는 버터로 바삭바삭하게 구운 뱅어 요리에 모젤 백포도주를 곁들여 시작됐다. 생선 요리를 다 먹자, 곧 두 번째 요리가 나왔다. 이번에는 큼지막한 로스트비프였다. 그녀가 고기를 마이크 앞에 놓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칼로 얇게 잘라 하녀가 모두에게 돌릴 수 있도록 접시 위에 담았다. - 로알드 달 ‘맛’ 중에서주식중개인 마이크가 만찬을 열었다. 그는 자신이 돈만 좇는 사람이 아니라 예술과 문화에도 조예가 깊은 교양인임을 알리고 싶었다. 화려한 식탁을 자랑하며 포도주에 대한 지식도 늘어놓았다. 특별..

“끔찍해서 못읽겠다”…김창완 ‘채식주의자’ 감상평에 한강이 사과한 이유

조선일보  2024. 10. 15. 11:34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그의 작품을 읽어보려는 독자들이 늘고 있는 가운데, 가수 김창완이 ‘채식주의자’를 읽던 도중 “끔찍해서 안 읽고 싶다”는 반응을 낸 8년 전 영상이 재조명되고 있다. 15일 유튜브에 따르면 ‘KBS 인물사전’ 채널에 지난 11일 올라온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직접 읽어주는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라는 제목의 영상이 인기 급상승 동영상 6위에 올랐다. 이는 2016년 5월 방영된 KBS ‘TV, 책을보다-2016 맨부커상 수상 작가 한강을 만나다’의 일부 장면으로, 이 방송에서 한강은 진행자 김창완과 마주앉아 책을 낭독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김창완은 채식주의자인 아내를 이해할 수 없는 주인공 영혜의 남편 시점에서 서술되..

[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267] 격차 없는 세상은 오지 않아

조선일보  2024. 10. 2. 00:16“동무들! 우리 돼지들이 이기심이나 특권 의식에서 이렇게 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 상당수는 사실 우유와 사과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 자신도 싫어합니다. 동무들, 농장의 모든 관리와 조직이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밤낮으로 여러분의 복지를 위해 고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유를 마시고 사과를 먹는 것도 바로 여러분을 위해서입니다. 우리 돼지들이 임무를 다하지 못하면 존스가 돌아올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존스가 돌아올 것이 틀림없습니다.       - 조지 오웰 ‘동물 농장’ 중에서외모, 재능, 환경의 차이는 개인의 힘이자 사회를 움직이는 중요한 에너지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차이를 격차로 규정하고 그 간격을 없애야 이상적인 사회가 완성된..

[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266] 퇴임 대통령 예우법, 눈꼴사납다

조선일보  2024. 9. 10. 23:54  수정 2024.09.11. 15:15나는 미니밴 옆에 서서 애덤이 경호원과 수행원들에게 둘러싸인 채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들은 재빨리 움직였다. 누가 보면 숲속에 망원 조준기를 겨냥한 암살자가 숨어 있다는 제보라도 받은 모양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이 모두 들어가자 저택의 창마다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잠깐이나마 이곳이 권력의 잔재가 아니라 권력의 진정한 핵심이라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모든 것이 낯설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 로버트 해리스 ‘유령 작가’ 중에서감옥에만 가지 않으면 대통령은 퇴임 후 풍족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다. 재임 연봉의 95%에 달하는 비과세 연..

[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265] 정치인의 거짓말은 범죄다

조선일보  2024. 8. 27. 23:56지난 59년간 나를 괴롭혀 왔던 숙제가 이제 다 끝났다. 우리가, 롤라와 마셜과 내가 범죄를 저질렀다. 나는 원고에서 그 범죄를 묘사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것도, 이름과 장소와 정확한 정황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것도 숨기지 않는 것이 내 의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사료를 편찬하듯 그 모든 것을 원고 속에 집어넣었다. 범죄가 있었다. 그러나 그 곁에는 사랑하는 두 사람도 있었다. 연인들과 그들을 위한 행복한 결말, 이것이 밤새도록 내 머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               -이언 매큐언 ‘속죄’ 중에서보행을 도와준 행인을 폭행범이라고 거짓 신고한 80대 노인이 300만원의 벌금형을 받았다. 목격자 진술과 CCTV 판독 결과, 남성은 노인이 넘어지지 ..

[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264] 구태의연한 금메달 깨물기는 이제 그만

조선일보  2024. 8. 13. 23:56“난 드래곤 금화를 원해요.” “암.”금빛 주화가 나타났다. 연금술사는 금화를 손가락 관절 위로 굴렸다. 아침 햇살을 받은 드래곤이 번쩍이면서 연금술사의 손가락에 금빛을 드리웠다. 페이트는 금화를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닿는 금이 따뜻했다. 그는 금화를 입가로 가져가서, 전에 본 대로 깨물어 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금에서 어떤 맛이 나는지 잘 몰랐지만, 그래도 바보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 조지 R R 마틴 ‘얼음과 불의 노래’ 중에서최소 인원으로 올림픽에 참가한 우리나라 선수단이 기대 이상의 많은 금메달을 획득했다. 태극기가 게양되고 애국가가 울려 퍼질..

[자작나무 숲] 톨스토이는 왜 不倫의 여주인공을 사랑했을까

조선일보  2024. 7. 1. 23:59 ‘안나 카레니나’는 처음 읽으면 가정 파괴하는 불륜 소설 두 번째 읽으면 도덕 운운하는 사회의 위선과 이중성 비판 세상은 당장 심판을 원하지만, 문학은 커튼 뒤를 드러낸다 “나를 향한 그의 사랑이 끝난 거죠.”(He stopped loving me.) 프랑스 여배우 잔느 모로가 자신을 떠나간 연인(루이 말 감독)에 관해 남긴 말은 그것이 전부였다. 프랑스인답다고, ‘쿨’하다고 생각했더니만, 실은 그녀 자신이 만만찮은 연애 편력자였다. 내가 자유로우면 상대도 자유로이 풀어주고, 내 사랑이 끝나면 그의 사랑도 보내주기 쉬울 듯하다. 두 시인 차이는 식어버린 열정의 대응 방식에 있다. 실제 삶에서 푸시킨은 사랑의 승자였고, 레르몬토프는 패자였다. 돈주앙을 자처할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