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敎養·提言.思考 1406

[자작나무 숲] 구태여 태극기가 아니더라도

조선일보  2024. 9. 9. 23:57 100m 광화문 국기게양대 논란되자 한 달간 의견수렴 참여 겨우 522명… 전 국민 0.001%가 대표성 있나 구심점 간절하겠지만… 광장의 정체성이 무엇일까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바실리 성당을 배경으로 외국인 여학생이 셀피를 찍는다. 손에 흰 종이가 들렸고, 거기 ‘THE’라고 적혔다. 그렇다. 여기가 바로 러시아의 ‘그곳’이다. 이반 뇌제가 바실리 성당을 세우고 그 앞에서 법령을 선포한 16세기 이래 붉은 광장은 러시아제국, 사회주의 소연방제국, 포스트 소비에트 제국이 민중과 만나는 역사 현장 1번지였다. 그런데 붉은 광장은 나라의 상징적 아이콘일 뿐, 공식 국가상징물은 따로 있다. 크렘린궁 지붕 위의 삼색 국기, 스파스카야 종탑 위의 붉은 별, 그리고 2차 ..

[백영옥의 말과 글] [370] 매미와 귀뚜라미의 시간

조선일보  2024. 9. 6. 23:52 8월 말, 미루었던 휴가를 다녀왔다. 여행 전, 저녁 산책을 하던 공원에서 아직 여름이 끝나지 않았다는 듯 자지러지던 매미 소리가 무색하게 어느새 낭창낭창한 귀뚜라미 소리가 들렸다. 문득 시절인연(時節因緣)이란 말이 떠올랐다. 이 말은 본래 불교 용어로 “모든 현상은 어떤 시기가 되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뜻인데 최근에는 친구나 연인 관계에서 더 많이 쓰인다. 인연에도 생로병사와 유효 기간이 있다는 뜻이다. 사람이 살면서 판단하기 어려운 게 ‘때’를 아는 것이다. 특히 시작할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건 더 힘들다. 바다에는 밀물과 썰물이 몰아치는 ‘물때’가 있다. 노련한 어부는 물때를 잘 파악해, 물이 들어올 때 바다로 나가고, 빠지기 전에 돌아온다. 지혜로..

[에스프레소] 아파트 관리비까지 법으로 해결한다면

조선일보  2024. 9. 2. 23:58  수정 2024.09.03. 07:17 소송에 관리비 계좌까지 압류 낡은 엘리베이터 교체도 못 해 법정이 된 정치, 양극화 불붙여 고발·특검·탄핵이 늘 능사인가 “(입주자 대표 회의‧입대의) 전 회장이 관리비 계좌를 압류하였습니다.” 최근 살고 있는 아파트 1층 출입구에 붙은 짧은 공고문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입대의 내부 갈등이 상당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관리비 계좌에 압류가 들어온 건 다른 문제였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에 법정의 논리가 침투하면 이래서 위험하다. 전자가 조정과 타협을 근간으로 한다면, 후자는 결국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기 때문이다....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 수사에서 피고였던 이들이나, 정권 교체 이후 거꾸로 입장이 바뀐 민주당 인사들을 만..

[백영옥의 말과 글] [369] 에세이의 맛

조선일보  2024. 8. 31. 00:00 올여름 “보통 사람들은 각자의 ‘호불호’라는 게 있잖아? 근데 너는 ‘호호호’가 있는 것 같아!”라는 귀여운 문장에 꽂혀 영화감독 윤가은의 에세이를 읽기 시작했다. 어떻게 지내냐는 말에 “요즘 ‘아네스 바르다’랑 ‘켄 로치’ 영화를 다시 보고 있는데”라고 말하려다가 ‘뻥’이라며 “드라마 ‘펜트하우스’와 ‘결혼 작사 이혼 작곡’을 보는 재미로 에너지를 충전”한다는 말에선 빵 터졌다. 문득 ‘니체’와 ‘프루스트’를 다시 읽고 있다고 말하려다가, 주말이면 ‘반드시 끝내는 힘’ 같은 자기 계발서와 ‘나는 솔로’를 보며 바닥난 에너지를 긁어 담는다고 말하는 내가 상상됐기 때문이다. “아무도 못 봤겠지?” 하는 마음으로 빅맥에 콜라를 원샷하는 비만 클리닉 의사 같은 기분..

英 이통사의 양심 경고 “11세 미만 스마트폰 뺏어야”

국민일보  2024. 8. 27. 00:04 영국 대형 이동통신사가 11세 미만의 어린이에게 스마트폰을 주지 말라고 경고했다. 소비자의 스마트폰 이용률이 오를수록 이익이 커지는 이동통신사가 이런 권고를 내놓는 것은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25일 가디언에 따르면 영국 이동통신사인 EE는 이런 권고를 포함한 새로운 안내 지침을 내놓을 예정이다. 이 지침에는 ‘11세 미만 어린이에게는 전화와 문자만 가능하고 인터넷 접속은 불가능한 휴대폰을 줘야한다’는 등의 내용이 담긴다. 영국 이동통신사가 이런 내용을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EE는 또한 13세 미만에게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이용을 제한할 것을 권고할 계획이다. 13세 이상 16세 미만 청소년의 경우 SNS 접근은 허용하되 여전히 부모의 관리가..

[백영옥의 말과 글] [368] 왜 내게만 이런 일이 생길까

조선일보  2024. 8. 23. 23:50 하지현의 책 ‘꾸준히, 오래, 지치지 않고’에서 정신과 진료실에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근데 저 같은 환자는 처음이시죠?”라는 걸 보고 팩폭이라고 직감했다. 그의 전작 ‘그렇다면 정상입니다’ 역시 자신만 이상한 것 같다는 환자들의 말에 대한 세심한 답변이라는 것도 알아챘다. ‘착하게 산 내게 왜! 왜 나만!’이란 비통함은 본인 얘기를 소설로 쓰면 책 한 권이라는 사람들의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배부르고 등 따스우면 편안해진다. 행복은 이처럼 나른하고 모호하다. 이에 비해 불행하면 온갖 생각이 머리를 두드리며 편도체가 활성화된다. 인간의 부정 편향은 바람에 흔들리는 풀숲에서도 맹수의 존재를 파악해야 생존할 수 있었던 우리 조상의 원시 뇌 때문인데, 99개의 선..

[백영옥의 말과 글] [367] 확신의 함정

조선일보  2024. 8. 16. 23:55 나심 탈레브의 책 ‘블랙 스완’에는 칠면조 우화가 나온다. 아침이면 먹이를 받아먹는 칠면조가 있었는데 하루도 빠지지 않는 일상이었다. 아침에 모이를 준다는 칠면조의 생각은 점차 확신으로 변했다. 그렇게 농장에서 1000일을 보낸 칠면조에게 1001일 되던 추수감사절 전날이 찾아왔다. 그날 농장주의 손에는 모이가 없었다. 대신 그는 칠면조의 모가지를 움켜잡았다. 칠면조의 운명을 결정한 건 평온했던 1000일이 아니라, 1001일이 되던 그 하루였다. 문학 포럼에서 음식이 상하기 가장 좋은 곳이 어디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습하고 더운 장소를 떠올리는데 시인의 입에서 냉장고라는 답이 바로 나왔다....우리 중 누구도 냉장고 안에선 음식이 썩지 않을 거라고 믿..

[백영옥의 말과 글] [366] 노잼 라이프

조선일보  2024. 8. 9. 23:50 오래전 조카가 하는 게임이 너무 재미있어 보여 다운받은 적이 있다. 시작하자마자 얻어터지고 게임이 바로 종료됐다. 게임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외워야 할 게 많았는데 이동, 공격, 방어, 아이템 사용 등 기본적 무기 사용 방법을 배워야 제대로 게임을 즐길 수 있었다. 단순하고 쉬워 보이는 게임에도 기초가 있어야 했다. PT 수업을 받을 때 가장 이해되지 않았던 건 “웨이트 트레이닝처럼 재밌는 건 없다!”는 트레이너의 주장이었다. 공감이 전혀 안 되던 그 말이 이해된 건 지루한 근력 운동을 3개월 반복한 후, 두부 같던 팔뚝에 약간의 근육이 생긴 걸 느낀 다음부터다. 쾌락과 기쁨은 다르다. 재미의 기쁨은 즉각적일 때도 있지만 나중에 오는 경우가 더 많다. 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