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24. 9. 9. 23:57
100m 광화문 국기게양대 논란되자 한 달간 의견수렴
참여 겨우 522명… 전 국민 0.001%가 대표성 있나
구심점 간절하겠지만… 광장의 정체성이 무엇일까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바실리 성당을 배경으로 외국인 여학생이 셀피를 찍는다. 손에 흰 종이가 들렸고, 거기 ‘THE’라고 적혔다. 그렇다. 여기가 바로 러시아의 ‘그곳’이다. 이반 뇌제가 바실리 성당을 세우고 그 앞에서 법령을 선포한 16세기 이래 붉은 광장은 러시아제국, 사회주의 소연방제국, 포스트 소비에트 제국이 민중과 만나는 역사 현장 1번지였다.
그런데 붉은 광장은 나라의 상징적 아이콘일 뿐, 공식 국가상징물은 따로 있다. 크렘린궁 지붕 위의 삼색 국기, 스파스카야 종탑 위의 붉은 별, 그리고 2차 세계대전 희생 용사의 ‘꺼지지 않는 불꽃’을 말한다.
‘가장 높이, 가장 크게!’ 이것이 전체주의 이념의 표준 슬로건이다. 우월감과 자긍심의 개념 같지만, 열등감과 호전성의 발로인지 모른다. 최상급은 과시와 강박의 언어여서 폭력적이면서도 유치하게 느껴진다. 최근 광화문 광장의 초대형 태극기 설치안이 등장했을 때 엄습해온 불편한 기시감은 이런 일련의 상징물에 대한 기억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100미터짜리 빛기둥 국기 게양대 설치안이 논란에 부딪히자 서울시는 한 달간의 시민 의견수렴 절차를 거쳤다. 서울시 홈페이지에 의견을 낸 522명 가운데 59%는 찬성(그중 거의 대부분 태극기 게양 찬성), 40%는 반대였다.....행정 주체의 선의와 고충도 충분히 이해되지만, 국가상징물 설치가 왜 필요한가, 무엇을 상징으로 삼을 것인가는 보다 긴 숙고와 합의를 요구하는 질문이다. ‘상징’ 자체가 통합의 메시지이며, 광장은 모든 시민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분열 속의 무관심, 질서 속의 무질서라는 기괴한 조화가 오늘 이 광장, 이 사회의 정체성이다. 그 현장에 어떤 구심점이 간절할 수는 있겠다. 다만 하루아침의 유형물이 그 역할을 해낼지는 의문이다.
https://v.daum.net/v/20240909235713295
[자작나무 숲] 구태여 태극기가 아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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