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2020.05.08 문학수 선임기자)
![[화제의 책]‘명사’로 완수된 적 없는 민주주의는 부단히 추구해야 하는 ‘동사’](http://img.khan.co.kr/news/2020/05/08/l_2020050901000722800069831.jpg)
민주주의는 없다
애스트라 테일러 지음·이재경 옮김 |반니 | 472쪽 | 2만2000원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내세웠던 명분은 민주주의였다. ‘중동에 민주주의를 가져오기 위해서’였다.
사실 이런 사례는 세계 곳곳의 현대사에서 허다하다. 멀리 갈 것도 없다.
1972년 한국에서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이른바 ‘유신’을 선포하면서 ‘한국식 민주주의’를 내세웠다. 당
시 어린이였던 지금의 장년들은 ‘우리 몸에 맞는 옷’ 운운했던 그때의 정치적 표어를 지금도 기억한다.
당시 권력자는 그렇듯이 대대적으로 ‘유신=민주주의’라고 홍보했다.
도대체 민주주의란 무엇일까.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가.
실제로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모호하고 변화무쌍하다. 그러다보니 오남용이 빈번하다.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전제부터 그렇다. 예컨대 군주제 국가에서는 통치자가 누구인지 금세 안다.
왕의 사진을 가리키면 된다. 그러나 이 책에도 나와 있듯이 민주주의의 주체인 “국민은 추상적”이다.
손가락으로 가리킬 것이 없다. 그래서 저자는 이런 말을 한다.
“나는 민주주의라는 단어에 열광한 적이 없다.
정의, 평등, 자유, 결속, 사회주의, 혁명 같은 단어들이 내 마음을 더 깊이 울렸다.
이 단어들에 비한다면 민주주의는 의미가 두루뭉술하고 심지어 가치를 잃은 말로 다가왔다.”
자본주의란 본질적으로 불평등한 경제체제다. 한국에서는 그것이 곧 민주주의인 것처럼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런 시각은 미국에서 먼저 태동했다. 책에 따르면 1947년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18분간 연설하면서
‘자유’(Freedom)라는 단어를 24회 사용했다. 놀랍게도 ‘평등’(Equality)은 단 한 차례도 입밖에 나오지 않았다.
저자는 “그 직후에 냉전이 시작됐다”면서 “민주주의의 중심이었던 자유와 평등”이 냉전체제의 스펙트럼에서
양끝을 차지하는 상황이 벌어졌다고 설명한다. 말하자면 “자유와 평등의 단절”이다.
원래는 동전의 양면이었던 두 개의 가치는 이별했다.
저자는 미국의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작가다. 올해 41세인 여성이다. 그간의 작품으로 보건대 좌파적 성향이 뚜렷하다. 그는 “민주주의라는 말을 지지할 절대적이고 결정적인 단 하나의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게다가 2차 세계대전 이후 민주주의라는 말의 오남용이 빈번해지면서, 이제는 정작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그 정체성마저 희미해진 것이 사실이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선거에서의 1인 1표, 헌법상의 권리, 시장경제 등의 “매우 한정적인 개념”을 떠올린다. 혹자는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평화로운 권력 이양” 등의 “매가리 없는 말”을 내뱉는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듯이 “민주주의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일단 민주주의의 출발부터가 그랬다. “아테네의 대규모 노천 집회는 시민들에게 모두 모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거대한 소크라테스식 질문을 논할 것을 강제”했다. 이 민회에 보통사람들,
즉 ‘데모스’가 “수천명씩 운집해 어떤 종류의 사회에서 살고 싶은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를 숙의”했다.
오늘날 우리가 민주주의를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이유의 출발점이다.
그만큼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는 복잡다단하며, “논의 외에 행동까지 요구”한다.
얼핏 대립적인 것으로 보이는 ‘자유’와 ‘평등’은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민주주의는 처음부터 그렇게 대립적인 것들의 조화라는 숙명을 지니고 태어났다.
저자는 “외견상의 대립들이 민주주의의 토대가 된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민주주의는 일원적이면서 다각적이고, 개인적이면서 집단적이고, 평등주의를 위계주의와 섞고,
자율과 통제를 버무리는 체제다.
이것들은 대립이기보다 역설이다. 충돌하기 마련이지만 반드시 공존해야 한다.”
책은 그렇게 대립적인 두 개의 요소를 하나씩 짝지어 거론한다.
자유와 평등은 물론이거니와 갈등과 합의, 포함과 배제, 강제와 선택, 즉흥과 체계, 전문지식과 여론,
지역과 세계, 현재와 미래가 각자 하나의 챕터로 이뤄져 있다.
그러면서 이끌어내는 결론은 “민주주의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는 점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단 한번도 존재한 적이 없다”.
그것은 유동적 과정,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말한다.
“민주주의의 모순과 기회들을 수용한 채 부단히 긴장 속에 사는 삶, 그것이 이 책에서 내가 말하려는 바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5082133005&code=96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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