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20.04.11 김태훈 출판전문기자)
정당이 책임지는 정치 실종되고 근시안적 여론으로 정책 결정
지식인 통치·실용주의 독재도 민주주의 결점 보완하지 못해
쿠데타, 대재앙, 정보권력
데이비드 런시먼 지음ㅣ최이현 옮김ㅣ아날로그ㅣ323쪽ㅣ1만6000원
2015년 7월, 국가 부도에 몰려 있던 그리스에서 민주주의를 희화화하는 사건이 있었다.
코미디는 이 나라가 유럽 채권국들의 긴축재정 요구를 국민투표에 넘겨 부결시킨 뒤 벌어졌다.
독일 등 채권국들이 추가 구제금융을 주지 않겠다고 협박하자
총리가 "국민투표 결과를 따를 수 없다"고 선언한 것이다.
국민투표라는 민주적 절차에 기대어 채권국 요구를 피하려 했던 꼼수도, 총리 말 한마디로
국민의 결정을 뒤엎은 조치도 모두 이 나라 민주정의 위기를 드러낸 사건이었다.
그리스에서 민주 정치는 나약하기 그지없다. 50%에 이르는 청년실업, 대학생보다도 많다는 연금 수급자 폭증,
극심한 저출산 등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한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반세기 전엔 군부가 해결사로 나섰지만 지금 이 나라에서 쿠데타 발발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정치학과 교수인 저자는 이 책에서 민주주의가 세계 곳곳에서 위기에 빠졌다고 진단하고,
그 이유를 분석한 뒤 민주주의 이후의 대안까지 탐색한다. 물리력을 동원한 쿠데타는 이제 무대에서 퇴장하고 있다.
그러나 터키, 폴란드, 인도, 헝가리 등에선 은밀하고 교묘하고 점진적인 쿠데타가 진행 중이다.
책은 이 나라들이 공약성 쿠데타(선거를 통해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받은 사람이 민주주의를 장악)나,
행정권 과용(권력을 가진 자가 단숨에 민주주의를 전복하지 않고 체제를 조금씩 약화시킴)을 통해
민주주의를 허물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스 국민이 지난 2016년 2월 수도 아테네 도심에서 정부의 재정 긴축 조치에 반발해 시위를 벌이고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어느덧 중년에 이른 민주주의에 할 일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는 점도 쇠락의 이유다.
민주주의는 노예를 해방하고, 참정권을 확대했지만 이 눈부신 성취가 더 이상 민주주의에 기대할 게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게다가 그리스 사태에서 보듯 문제 해결 능력에도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환경오염이나 기후변화를 다룰 때도 민주주의는 독재 체제보다 비효율적이다.
근시안적인 국민이 비전 있는 지도자를 몰아내기도 한다.
민주당 케네디 정권은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해결했지만 이후 치러진 중간선거에서 패배했다.
당시 유권자들은 목숨을 앗아갈지 모르는 핵보다 주머니를 채워줄 곡물 가격이 불안정한 것에 짜증 나 있었다.
이런 얄팍한 표심이 책임 있는 정치인의 설 자리를 없앤다.
21세기 들어 민주주의는 새로운 도전을 맞고 있다.
홉스가 저서 '리바이어던'에서 예고했던 근대국가는 칼을 들고 나라를 다스렸다.
하지만 저커버그의 페이스북은 20억 가입자와 휴대전화로 무장한 채 정치 풍토를 바꾸고 있다.
새로운 소셜미디어 환경에서 대의민주주의는 번거롭고 피드백에 게으른 퇴물로 전락했고, 정당의 인기는 갈수록 시들어간다.
1950년대 300만명에 이르렀던 영국 보수당원 수는 이제 10만명대로 쪼그라들었다.
그 틈을 비집고 고대 그리스의 위험한 직접 민주주의가 부활해 영토를 넓혀가고 있다.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는 온라인 투표로 시 예산을 통제하고,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도 정치적 안건을 같은 방법으로
사전에 심사한다. 정책과 예산을 여론조사로 정하는 나라에서 대의정치는 유명무실해진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에 대안은 있는가. 저자는 선거를 없애고 정치인이 기업 CEO처럼 나라를 운영하는 기업 정부,
지식인이 정치를 담당하는 에피스토크라시, 민주주의의 비효율을 걷어내고 통치 효율성만 취하는 실용주의적 독재 등이
갖는 장·단점을 분석한다.
중국이 택한 실용주의 독재는 짧은 시간 안에 국민소득을 늘리고 수명을 증가시켰지만,
국가공무원 손에 기본권이 유린당할 위험을 드러냈다. 저자는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는 중국식 통치가
아무리 효율적이어도 받아들일 가능성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저자는 민주주의가 종국엔 사망할 것으로 본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이 갖가지 생명 유지 장치를 고안해 민주주의의 죽음을 오랜 기간 유예할 것으로 전망한다.
그런데 변화에 맞춰 스스로 개혁해 온 것이 민주주의의 역사 아닌가.
앞으로도 그러지 못할 이유는 없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4/11/202004110009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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