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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난세계사] 죽음의 행렬, 메리의 남자들

바람아님 2015. 3. 11. 11:12

헤럴드경제 2015-03-10

 

 

 

45세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여왕 메리 스튜어트(1542-1587). ‘사랑에 눈먼 여왕’ 혹은 ‘남편을 살해한 음탕한 여왕’이라는 양 극단의 평가를 받는 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메리는 16세기 중반 종교 혁명으로 흔들리는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납니다. 그런데 생후 6일. 아버지 제임스 5세가 전쟁 중에 얻은 병으로 30세에 요절하면서 메리는 사실상 스코틀랜드의 여왕이 됩니다. 배냇저고리도 벗지 못한 메리에게 스코틀랜드의 왕관이 굴러떨어진 것이죠.

스코틀랜드의 여왕, 프랑스의 왕비. 메리 스튜어트.

하지만 메리의 어머니인 마리 드 기즈는 메리가 성장할 때까지 스털링 성에 꽁꽁 숨겨야 했습니다. 스코틀랜드를 노리고 있던 잉글랜드의 왕 헨리 8세가 자신의 아들과 결혼시키겠다며 메리를 찾아 나섰기 때문입니다. 메리의 어머니는 생후 6개월도 되지 않은 딸을 잉글랜드의 왕가에 맡길 수 없었습니다. 헨리 8세의 눈을 피해 산속 깊은 수도원에서 지낸 메리는 생후 9개월 만에 대관식을 치르고 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그리고 6살이 된 메리. 프랑스 앙리 2세의 맏아들 프랑수와 2세와 약혼해 프랑스로 건너갑니다. 섬나라 스코틀랜드와는 다르게 르네상스 문화의 빛을 온몸으로 느낀 그녀는 프랑스의 왕궁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자라죠. 그리고 16살에 두 살 연하의 신랑, 프랑수와 2세와 결혼식을 올린 메리는 이듬해 프랑스의 왕비가 됩니다. 앙리 2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프랑수와 2세가 왕으로 즉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메리의 첫 번째 남편, 프랑수와 2세(1544-1560).

이쯤에서 정리하면 메리는 17살의 나이에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자 프랑스의 왕비인 겁니다. 또 메리는 당시 잉글랜드의 여왕인 엘리자베스 1세와 진외당숙 사이, 다시 말해 헨리 7세의 적장녀의 적손녀이였기 때문에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권까지 가지고 있었죠. 메리의 의지와 무관에게 지상 최고의 권력이 주어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메리에게 주어진 운명의 굴레가 그의 생에 어두운 그림자를 몰고 온 것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병약했던 메리의 첫 번째 남편 프랑수와 2세가 요절하면서 메리는 18살에 미망인이 되거든요. 더욱이 말입니다. 이후 메리를 사랑한 남자들 모두가 하나같이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알면 어떤 생각이 드실까요.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미망인이 된 메리는 낯선 스코틀랜드 땅으로 돌아옵니다. 스코틀랜드의 섭정을 이복 오빠에게 맡기고 프랑스 왕궁에 머물 수도 있었지만 메리는 고향으로 돌아가 여왕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당시 스코틀랜드는 피를 피로 씻는 종교분쟁이 달아오르고 있던 대혼란의 나라였습니다. 가톨릭 교도인 메리는 이미 스코틀랜드에 굳게 자리 잡기 시작한 프로테스탄트를 배척하지 않았지만 금세 정치에 진절머리가 났습니다. 메리는 수도사나 귀족 보다 시인과 화가, 음악가와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메리의 두 번째 남편, 헨리 스튜어트 댄리.

그리고 이맘때부터 메리를 사랑한 남성들의 죽음의 행렬이 이어집니다. 프랑스에서부터 메리를 따라 스코틀랜드로 온 샤트라르. 그는 메리에게 시를 헌정하며 사랑을 한 몸에 받았지만 메리의 침실에서 목이 베인 채 발견되거든요. 메리의 총애를 얻은 젊은 음악가였던 데이비드 리치오도 어느 날 성 안에서 온몸을 난도질당한 채 죽게 됩니다.

그리고 메리가 내로라하는 유럽 궁정의 왕자들을 뿌리치고 약혼한 연하의 헨리 스튜어트 댄리. 훤칠한 외모에 한눈에 반한 메리는 댄리와 뜨거운 사랑에 빠집니다. 문제는 두 번째 남편 댄리와의 사랑이 너무 일찍 식어버렸다는 것이죠.


(*) 메리와 불같은 사랑을 댄리는 어떻게 생을 마감했을까요. 11일(수) 메리의 세 번째 남편, 보스 웰 백작의 이야기가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