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음악칼럼 263

[강헌의 히스토리 인 팝스] [209] 인도의 약진

조선일보  2024. 4. 29. 00:01 A.R. Rahman (2008) 인도의 뭄바이 빈민가를 배경으로 한 2008년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이듬해 아카데미 영화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한 트로피 8개를 휩쓸었다. 이 영화는 95년 아카데미 역사상 남녀 주조연상 부문에 단 한 명도 후보를 올리지 못했으나 작품상과 감독상을 받은 여섯 번째 영화다. 인도는 ‘발리우드’라고 불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자국 영화 시장을 가진 나라지만 인도 영화만의 독특한 개성으로 인해 해외시장에서의 영향력은 아직 미미한 수준이다. ‘슬럼독 밀리어네어’ 또한 원작 소설은 인도 작가 비카스 스와루프의 것이지만 연출은 영국인 감독 대니 보일이 맡은 영국 제작 영화다. 팝 음악사에서 인도가 등장하는 순간은 사..

[강헌의 히스토리 인 팝스] [208] 작고 작은 이 세상

조선일보 2024. 4. 22. 03:03 ‘It’s a Small World’(1964) 지구상의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된 노래는 어떤 것일까? 장르를 불문하고 본다면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전 세계에 울려 퍼지는 ‘Stille Nacht, Heillige Nacht’일 것이다. 우리나라 제목으로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으로 번역된 이 노래는 오스트리아 오르가니스트이자 합창단 감독인 프란츠 자비어 그루버가 작곡했다. 백 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된 이 노래는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아이들을 위한 노래들 중 많은 국가 및 민족들이 공유하는 곡을 꼽으라면 생일 축하 노래로 정착한 ‘Happy Birthday to you’와 셔먼 형제가 작곡한 ‘It’s a Small World’가 될..

[강헌의 히스토리 인 팝스] [206] AI가 만든 음악

조선일보 2024. 4. 8. 03:00 Benoit Carré (2016) 1997년 IBM의 수퍼컴퓨터가 체스 세계 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를 꺾었다. 그리고 2016년, 구글의 딥마인드가 개발한 알파고는 당시 세계 챔피언 이세돌 9단을 상대로 다섯 판 중 네 판을 압도하며 승리했다. 이 세기의 대결을 두고 바둑과 컴퓨터 전문가 대부분이 이세돌의 승리를 예측했지만 ‘인간계’의 최고수는 고작 1승을 따내는 데 그쳤다. 그러나 그 1승은 공식 대국에서 인간이 알파고를 상대로 따낸 유일한 승리로 남는다. 인공지능이 이세돌 9단을 무너뜨렸던 바로 그 해에 소니의 CSL 연구소에서 개발한 플로 머신이라는 소프트웨어는 이 곡을 포함한 인공지능 작곡 팝음악 두 곡을 세상에 선보인다. 이 노래의 작사와 편곡은 프랑스..

[강헌의 히스토리 인 팝스] [204] 어느 내부 고발자의 죽음

조선일보 2024. 3. 25. 03:03 Jean-Michel Jarre ‘Exit’(2016) 기체 결함으로 계속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보잉사의 조립 공정 문제점을 폭로했던 존 바넷이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시의 한 호텔 주차장에서 총상으로 숨진 채 발견되었다. 미국 내 소셜미디어에서는 ‘미국 자본주의가 내부 고발자를 대하는 과정에서 러시아나 사우디아라비아보다 나을 게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같은 실망스러운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십년간 미국 사회를 강타한 가장 강력한 내부 고발자는 국가안보국(NSA) 소속 프로그래머였던 에드워드 스노든이다. 어릴 때부터 수재로 불렸던 그는 뛰어난 컴퓨터 능력으로 중앙정보국(CIA)을 거쳐 NSA에서 정보 보안 전문가로 일했다. 하지만 개인의 일거수일투족..

[강헌의 히스토리 인 팝스] [203] 의사 앞에 선 환자

조선일보 2024. 3. 18. 03:01 수정 2024. 3. 18. 05:23 AJR ‘Karma’(2019) “시간, 시간이 다 된 건 알아요/ 하지만 자꾸 슬픈 생각들이 엄습하고 멈출 수 없다면 어떡하죠/ 제가 왜 이렇게 허무한 지 진단이라도 좀 내려주세요/ 제발 처방만 내려주시면 무조건 따른다고 약속할게요..." 주치의 앞에 선 환자는 절박하다. 그리고 한마디라도 더 듣고 싶다. “나아지고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왜 난 나아지는 기분이 안 들까요(You say that I’m better, why don’t I feel better)?” 이렇게 반문하기도 한다. 애덤 멧, 잭 멧, 라이언 멧(팀명인 AJR은 이 삼형제의 이름 앞글자들을 따와서 만든 것이다)으로 구성된 뉴욕 출신의 이 트리오는 정신과..

[강헌의 히스토리 인 팝스] [202] 딥페이크 포르노그래피

조선일보 2024. 3. 11. 03:00 Michael Jackson ‘Privacy’(2001) “그만큼 사진 찍었으면 충분하지 않아? 왜 넌 그렇게 심하게 들이대는 거지?/너는 나 자신을 무너뜨리려고 하지/날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어?/나는 내 사생활이 필요해/그러니 파파라치, 내게서 꺼져줄래?...." 불혹의 나이에 들어선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이 ‘Dangerous’ 이후 십년 만에 발표한 ‘Invincible’ 앨범에 수록된 이 노래는 파파라치의 과도한 욕망 앞에 희생된 다이애나 왕세자빈의 죽음에 바치는 분노의 진혼곡이다. 하지만 이 노래 발표 후 그 자신도 아동 성추행 파문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온갖 구설과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이제는 파파라치나 몰카의 위협보다 더 끔찍한 첨단 기술이 사생활..

[강헌의 히스토리 인 팝스] [201] 불법 이민자와의 전쟁

조선일보 2024. 3. 4. 03:01 Genesis ‘Illegal Alien’(1983) “국경 너머 약속의 땅이 있지/ 모든 것이 쉽게 이루어지는 곳, 넌 그저 손만 내밀면 돼" 영국의 지성적인 록밴드의 대명사나 다름 없는 제네시스가 40여 년 전에 발표한 이 노래는 예나 지금이나 미국 사회의 뜨거운 감자인 남부 국경의 불법 이민자 문제를 다루고 있다. 목숨을 건 월경을 너무 가볍게 다루지 않았느냐는 비판도 있었지만 사실상 주제를 담고 있는 다음과 같은 반복적 후렴구는 그런 우려를 털어낸다. “불법적인 이방인이 되는 건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야(It’s no fun being an illegal alien).” 불법 이민자들이 합법적 절차를 걸쳐 시민적 권리를 얻은 것은 아니지만 그들 대다수가 미..

[강헌의 히스토리 인 팝스] [200] 침묵을 강요하는 소리

조선일보 2024. 2. 26. 03:02 Simon & Garfunkel ‘The Sound of Silence’(1964) 팝 역사상 가장 위대한 듀오로 칭송되는 사이먼 앤드 가펑클의 이 명곡은 표면적으로는 현대 사회의 의사 소통 부재를 얘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케네디 암살과 석연찮은 수사 과정에 대한 지적인 분노를 표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이 노래는 침묵 속에서 움직이는 기득권의 보이지 않는 손과 진실로부터 격리된 대중들에 강요되는 침묵을 다룬다. “사람들은 주장하는 대신 그냥 떠들어대고/ 경청하지 않고 그저 듣고 흘리며/ 사람들은 결코 같이 부를 수 없는 노래들이나 쓰고 있네/ 그래서 아무도 침묵의 소리에 감히 대들지 못하지/ 내가 말했네, ‘바보들, 당신들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