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일사일언] 아나운서의 '秒능력'

바람아님 2015. 8. 7. 07:28

(출처-조선일보 2015.08.07 박은영·KBS 아나운서)


박은영·KBS 아나운서 사진입사 9년 차가 된 지금도 선배들로부터 '아나운서의 기본은 라디오 뉴스다'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9시 뉴스 진행을 하든,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든 초심을 잃지 말라는 충고다.

라디오 스튜디오마다 설치된 전자시계는 시·분·초까지 여섯 자리(00:00:00)로 돼 있다. 
생방송 뉴스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끝나는 시간을 정확히 맞추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나운서의 초심(初心)을 유지한 채 초(秒)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게 라디오 뉴스를 진행할 때이다. 
뉴스 시간이 끝나기 정확히 3초 전 '지금까지 아나운서 박은영이었습니다. 
KBS'라는 멘트로 깔끔하게 마무리해야 한다. 뉴스를 잘한다는 것은 전달력이 높다는 말인데, 
시간을 엄수하면서 전달력까지 좋으려면 뉴스 낭독을 할 때 1분에 17~18회 숨을 쉬며 350 내지 370음절을 말해야 한다. 
이쯤 되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쏟아낸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라디오 뉴스뿐 아니라 예능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빠르게 받아쳐야 
예능인의 자질을 갖췄다는 얘길 듣는다. 
자신의 방송 분량을 확보하려면 다른 사람이 내가 하려던 멘트를 할 틈을 주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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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초(秒)능력이 직업병으로 발전해버렸다. 
친구들과 대화를 할 때도 질문에 빨리 대답하지 않거나 말을 천천히 하면 답답함을 느낀다. 
성난 황소처럼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나와 대화를 하다 보면 예능에 출연한 것 같단 얘기도 들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말은 이미 밖으로 쏟아진다. 
순발력이라고 포장하고 싶지만, 조급증일 뿐이다.

요즘 알게 된 것은 뉴스 전달력을 높이는 데 중요한 것이 바로 문단 사이의 호흡, 
기사와 기사 사이의 간격을 조절할 줄 아는 여유라는 점이다. 
국민 MC라 불리는 유재석씨와 촬영하며 인상적이었던 점도 그가 출연자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준 뒤 
간결하게 덧붙이는 촌철살인이었다. 
소개팅에서 성공하려면 상대의 질문에 2초의 여유를 가진 뒤 대답을 하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다른 이와 속도를 맞출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겠단 생각이 들면서도 문득 박정현의 노래 중 
'가슴은 늘 머리보다 더디죠'란 가사가 떠오른다. 
내 머리와 마음의 속도부터 일치시키는 게 먼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