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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의 6ㆍ25 징비록⑤]12·12 직후, 전두환 소장의 저녁 초대에 갔다

바람아님 2016. 1. 17. 00:47
조선일보 : 2013.11.22 19:04

내가 육군참모총장일 때 육사생도였던 그사람, 전두환….

(1) 군은 어떤 존재인가

낯선 후배 전두환, 그와의 어색한 만남

1979년의 해도 어느덧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던 무렵이었다. 10·26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세상을 뜬 뒤로 정국은 잠잠한 가운데 그 무엇인가가 머지않아 닥치리라는 불길한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이어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총격전이 벌어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른바 ‘12·12 사태’였다.

그로부터 1주일이 흘렀던 모양이다. 한국종합화학 사장을 맡고 있던 내게 연락이 왔다. 만나자는 전갈이었다. 12·12사태의 주역인 전두환 소장이 초청한 자리였다. 나는 이미 1960년 옷을 벗고 군문을 떠난 신분이었으나, 그들이 나를 우리 군의 창군 멤버로 전쟁까지 겪은 원로라고 여겼기 때문이었을까.

서울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 인근에 있던 한식집으로 기억한다. 나와 군 원로 몇 사람이 초청 대상이었다. 내가 가장 선임이었고, 후배이자 전선을 함께 오갔던 원로 후배들 셋이 함께 참석했다. 12·12의 주역이자 당시 정국의 핵으로 부상하고 있던 전두환 소장은 우리 군 원로들을 초청해 자신들이 벌인 사건의 배경을 알리고자 했다.
1979년 10월28일 오후4시 국방부 제1회의실에서 박대통령 시해사건 수사결과에 관해 중간발표를 하는 전두환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1979년 10월28일 오후4시 국방부 제1회의실에서 박대통령 시해사건 수사결과에 관해 중간발표를 하는 전두환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그와는 사실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전 소장은 육사 11기로 군문에 들어선 인물이다. 그가 육사에서 사관생도로 교육을 받고 있을 무렵, 나는 이미 육군참모총장의 자리에 있었다. 한참 차이가 나는 터라 그와는 만날 인연이 전무했던 것이다. 그러나 풍문으로는 그의 됨됨이를 들어 알고 있었다.

그는 차분하며 정중하게 왜 12.12 사태를 벌여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의 설명을 내가 알아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혼란한 정국에 대처해야 한다는 게 전두환 소장과 12·12사태 거사를 이끈 그룹이 내건 명분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정작 정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최소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분위기는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들의 설명에 화답하는 동료 원로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 주고받는 덕담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침묵했다. ‘또 군이 정치에 나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가 짓는 불쾌한 표정이 그의 예민한 정치적 촉각을 비켜 갔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조금 서글펐다. 자리에 동석했던 후배 원로 둘은 한참이나 아래인 전두환 소장의 행위를 칭찬했다. 그의 거사를 “아주 잘 한 일”이라고 추켜세우기도 했고, 그가 12·12의 타당성을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마음에 없을지도 모를 추임새를 넣으며 그에 화답했다.

식사 시간은 거의 한 시간 이상이 걸렸다. 일반적인 식사 자리에 비해서는 짧은 시간이었으나 내게는 매우 길게 느껴졌다. 어느덧 식사를 마칠 시간이 왔다. 나는 무덤덤하게 그 자리를 털고 나왔다. 동석자 중 한 사람은 김성은 전 국방부 장관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 밑에서 국방부 장관까지 역임한 후배다.
전직 국방장관을 비롯한 군 원로들이 2006년 10월 12일 서울 송파구 향군회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북한의 핵 실험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들은 정부에 작전통제권 단독행사 논의를 재검토할것을 주장하는 성명을 발표한 가운데, 김성은 전장관(오른쪽)이 모임의 취지를 밝히고 있다./조인원 기자
전직 국방장관을 비롯한 군 원로들이 2006년 10월 12일 서울 송파구 향군회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북한의 핵 실험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들은 정부에 작전통제권 단독행사 논의를 재검토할것을 주장하는 성명을 발표한 가운데, 김성은 전장관(오른쪽)이 모임의 취지를 밝히고 있다./조인원 기자

그 또한 식사자리가 매우 거북했던 모양이었다. 식당을 나서면서 우리는 서로 눈이 마주쳤다. 어색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상황의 여러 세부적인 모습은 달랐으나, 나는 내가 몸소 겪었던 4·19 정국의 어두웠던 풍경을 기억 저 멀리서 떠올리고 있었다. 우리 군은 정국의 혼란기를 타고서 어느덧 다시 몸을 정치의 한복판에 깊숙이 들이밀고 있었다.

전쟁의 교훈을 잊었던 우리

이듬해인 1980년의 봄은 예상대로 시끄러웠다. 급기야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는 유혈의 참극마저 빚어졌다. 군이 손에 쥔 병기, 그런 흉(凶)함이 다시 무서움을 드러냈던 것이다. 군사의 병기가 적(敵)이 다가서는 바깥을 향하지 않고, 우리 내부의 어느 누군가를 겨눈다면 반드시 무의미한 폭력과 희생을 부르고 만다.

그 이후의 정국이 어떻게 흘렀는지는 많은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다. 이후 들어선 정부의 행보에 대한 평가는 나중의 역사가들이 엄정하게 다룰 일이다. 내가 당시의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을 언급하는 것은 능력 밖의 일일 뿐이다.

단 한 가지, 내 소견을 덧붙일 게 있다. 군(軍)을 떠난 민(民)이 있을 수 없고, 민을 떠나 군이 바로 설 수도 없는 일이다. 따라서 국가의 간성(干城)인 군이 충성을 바쳐야 할 대상도 민이다. 그러나 민간의 일각에서도 문제는 늘 벌어지게 마련이다. 군은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움직여야 할 것인가. 군이 지닌 무기는 살상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군이 병을 움직일 때는 태산(泰山)과 같은 신중함을 지녀야 한다.

나는 6·25 때 김일성의 야욕에 맞서 싸우면서 한편으로는 내부에 숨어 있던 적,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등을 토벌했다. 아울러 무수한 대민(對民) 작전을 벌인 경험도 있다. 이는 비단 나 혼자만의 경험으로 쌓였던 것은 아니다. 전쟁을 치른 우리 대한민국 군대의 공통적인 체험이었다.

그럼에도 그해 봄, 우리가 어쩌면 현명하게 대처하면서 피해를 최소화했을 수도 있었을 상황에서 결국 피가 번지고 말았다. 혹심했던 여건 속에서도 끝까지 적과 싸우며 쌓았던 우리 군의 경험적 토대가 송두리째 버려진 게 아니었을까. 지금도 안타깝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전쟁은 한 민족이 품고 살아야 하는 가장 참혹한 기억이다. 우리는 그런 기억을 늘 헤집어 보면서 교훈을 살려야 한다. 그 ‘민족의 경험’, 6·25 전쟁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되살려 오늘을 맞이하고 있는가.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는 전쟁을 잊었다. 적어도, 1980년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에 깊이 빠져 들었다. 전쟁은 참담한 기억이지만, 그의 교훈을 되살리느냐의 여부가 어쩌면 그 민족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전두환 전대통령의 부인 이순자(가운데) 씨가 1995년 12월 8일 백담사에서 예불을 올리고 있다.
전두환 전대통령의 부인 이순자(가운데) 씨가 1995년 12월 8일 백담사에서 예불을 올리고 있다.

지금의 우리는 전쟁을 잘 알까

여담 하나 붙이자. 전두환 소장이 12·12 직후 초청했던 식사자리에서 나와 함께 침묵으로 일관했던 김성은 전 국방장관과의 이야기다. 우리 둘은 그 때 전두환 소장의 설명에 화답하며 성원까지 보냈던 나머지 두 동료가 그 후 ‘잘 나가는’ 모습을 자주 지켜봤다. 전두환 대통령이 이끄는 5공화국 정부의 지극히 높은 위치에 올라선 그 둘을 보면서 후배 김성은은 내게 이런 농담을 던지곤 했다.

“형님, 우리는 아무래도 낙제생 아니겠습니까? 그 때 전두환 소장한테 덕담이라도 건넸어야 하는 것 아니었나 몰라요….” 그는 농담조로 그런 말을 자주 했다. 그러면 나는 “실없는 소리 말라”며 핀잔했고, 둘은 결국 허허로운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나도 ‘잘 나가는 군인’이었다. 32세에 한국 최초의 별 넷 대장을 달았으니까 그렇다. 40만 병력의 1야전군을 창설해 이끌면서 한국군 전력 증강을 이끌었던 점도 자랑스럽다. 그렇다면 나는 승승장구(乘勝長驅)하는 군인이었던가. 그렇지만은 않았다.

내가 1957년 두 번째 육군참모총장직을 맡았을 때다. 나는 모든 군무(軍務)가 귀찮아진 적이 있다. 군령이 제대로 먹히지 않았고, 인사가 정치권의 개입으로 비뚤어졌다. 부하 장성들은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서대문의 제2 권력자 이기붕 의장의 말을 더 들었다. 일부는 노골적인 정치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2개월 동안 6·25전쟁 참전 16개 우방국을 순회하는 일정이었다. 나는 내 어깨에 단 별의 무게만큼, 아니 그보다 더 일을 부지런히 했다. 한시라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게 병사(兵事)다. 이어지는 변수에 대응하며 아울러 그런 다양한 변수가 빚어내는 모든 상황에 대비해야 하는 게 군사(軍事)다. 그런 생각 때문에 나는 6·25전쟁 이후 쉰 적이 별로 없다.

그런 내가 비행기에 몸을 싣고 두 달 여의 여행길에 올랐다. 나는 당시 마음이 울적했다. ‘우리는 벌써 전쟁을 잊었는가…’. 내 마음 속에서 메아리치는 아주 강한 그 의문 때문이었다. 그렇다. 우리는 그 때 이미 전쟁을 잊고 있었다. 그리고 1980년 초입에 내가 마주쳤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지금은 어떨까. 우리는 전쟁의 기억을 제대로 복원하며 그로부터 충분한 교훈을 살리고 있을까. 역시 그 점이 미덥지 않다. 우리는 어쩌면 그 잊는 행위를 반복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시작한 게 이 연재다. 이제 그 어두운 기억 저편으로 직접 넘어가 보자.

<정리=유광종, 도서출판 ‘책밭’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