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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 "고맙다 아가, 네 덕분에 할배는 요즘 살맛 난다"

바람아님 2016. 5. 31. 09:16

(출처-조선일보 2016.05.31 정유진 기자)

[육아일기 쓰는 할아버지들]

맞벌이 부부 대신 손주 돌보며 블로그에 성장 과정 꼼꼼히 기록
10년간의 일기, 책으로 내기도
"내 자식 키울 땐 바빠서 몰랐던 육아의 재미, 손주로 알게 돼"

'나이가 들어가면서 할아버지는 인생의 유한함을 느끼게 된다. 
손자 성규와 동행하는 삶도 언젠가는 종착점에 도착할 것을 생각하게 된다. 
손자는 계속 열차를 타고 가겠지만 할아버지는 내리게 될 날도 올 것이다. 
열차에서 내릴 때를 대비하여 손자에게 건네줄 그 무엇을 준비하게 되었다.' 네 살배기 손자를 돌보며 블로그에 
글을 올리던 이상인(65)씨가 '할아버지의 육아일기'를 책으로 펴내면서 쓴 글이다.

맞벌이 가정의 육아는 조부모 몫이 되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전국 맞벌이 518만6000가구 중 절반 가까이가 조부모에게 육아를 맡긴다. 
국립국어원이 '노부모가 맞벌이 자녀를 대신해 아이를 돌보다 생기는 정신적·건강상 문제'라는 뜻의 '손주병'을 
신조어로 등록한 것이 4년 전이다.
기사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김성규 기자
육아의 대부분은 할머니들이 떠맡지만, 요즘은 손주의 성장 과정을 꼼꼼히 기록하는 할아버지도 많다. 
"내 자식 키울 때는 먹고살기 바빠 아이가 어떻게 크는지도 몰랐지만, 
은퇴 후엔 아이를 자세히 관찰할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손주와 함께한 일과, 손주를 돌보며 느낀 애틋한 감정을 주로 블로그에 글로 담고 휴대폰 카메라로 찍은 손주 사진을 
함께 올리기도 한다.

은퇴 후 작은 농장을 마련해 농사를 짓던 박재율(72)씨는 맞벌이하는 두 아들 내외와 직장 다니는 아내를 대신해 
10년간 손주 넷을 차례로 돌봤다. 그간의 일기를 묶어 '할배꽃, 꽃 그늘'(트로이목마)이라는 책으로도 펴냈다. 
요즘엔 육아일기 내용을 토대로 '할배꽃·손주꽃'이라는 만화도 그린다.

'나는 힘들면서도 힘들지 않다고 생각하고, 오히려 즐겁다면 즐겁다… 
우리 손주들 네 명이나 몰고 다니는 걸 본 동대표 아주머니는 표창 상신해야겠다고 하신다. 
그때마다 겸연쩍게 '뭐, 제 새끼 제가 돌보는데요' 하고 웃어넘긴다.'

'오늘 하루 3번이나 뒤집었다. 30여년 전 제 애비보다 한 달이나 빨리 뒤집었다. 인류가 진화했나?'

박재율씨가 손주들 육아일기 내용을 토대로 그려 온라인에 연재하는 만화 ‘할배꽃·손주꽃’박재율씨가 손주들 육아일기 내용을 토대로 
그려 온라인에 연재하는 만화 ‘할배꽃·손주꽃’. /트로이목마 제공

박씨는 "조부모 육아라고 하면 주로 할머니가 손주를 돌본다고 생각하지만 
할아버지도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다"며 "아직 어린 손주들도 육아일기를 읽으면서 
할아버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느끼는 것 같다"고 했다.

전영철(63)씨는 아내와 함께 동갑내기 손자와 외손녀를 한꺼번에 돌본 경우. 
6년간 블로그에 손주들 육아일기를 써왔다. 
"조부모가 돌보는 아이라고 해서 남들보다 처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육아 서적을 두루 섭렵해가며 일기를 썼다"고 한다.

'오전 4시 30분에 다시 아이가 칭얼대기 시작했다. 일어나서 함께 놀아주기를 6시까지. 
마음속에서는 잠을 더 자야 한다는 것뿐이다.'

'손녀에게 할아버지는 함께 놀아주는 사람, 자기 부탁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다. 
아빠는 무언가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 
손녀의 작은 변심에 할아버지는 감사하기도 하고 조금은 섭섭하기도 하였다.'

임영주 부모교육연구소장은 "부모는 자기 아이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힘들지만, 할아버지는 한 발짝 물러서서 
집안 전통이나 살아온 지혜까지 담아낼 수 있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남긴 일기장을 들춰본 회사원 정모(26)씨는 "할아버지 집에서 밥 먹으며 재롱 떤 것과 같은 평범한 일상도 
할아버지에겐 특별한 사건이었음을 알게 됐다.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알게 해준 선물이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