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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희영 칼럼] 미국이 화내는 건 무섭지 않나

바람아님 2016. 8. 13. 07:36

(출처-조선일보 2016.08.13 송희영 주필)

사드 반대 여야 의원들, 중국 보복만 걱정할 뿐
미국의 분노는 안중에도 없어… 워싱턴은 찾아갈 생각도 안 해
美에도 아시아는 '핵심적 이익'… 오래 인내하지는 않을 것

송희영 주필 사진30여 년 전 한국과 미국 사이에 무역 마찰이 극심했다. 
미국은 한국산 TV 등 여러 품목에 무역 보복을 감행했다. 그러면서도 뒤에서는 협상과 대화가 진행됐다. 
우리는 막후 접촉을 통해 보복의 총알을 맞을 품목을 줄일 수 있었다.

미국 정부도 레이건 대통령의 개인적인 부탁을 들어달라고 했다. 그렇게 서울 강남에 메리어트호텔이 
문을 열었다. 기자들 앞에선 화를 내면서 방 안에서는 웃으며 식사하고 거래를 마무리했다.

그러던 미국이 얼굴빛을 바꾸고 나타난 것은 1997년 외환위기 때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대북정책을 놓고 클린턴 정부와 티격태격했다. 북핵 사태의 초창기였다. 
정상회담 도중 김 대통령은 "그만 끝내자"는 말까지 했다. 이견이 좁혀지지 않자 화를 낸 셈이다.

때마침 무역 적자로 달러 부족 사태가 심각해졌다. 
일본계 은행들이 한두 달 만에 수백억달러를 한꺼번에 빼가더니 뉴욕의 미국 은행들은 한국의 구원 요청에 손을 내저었다. 
그러면서 워싱턴에 가보라고 했다.

결국 미국과 일본이 요구한 것을 다 내주고도 긴급 수혈을 받지 못했다. 
그해 12월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자마자 그다음 날 미국이 파견한 '면접관'이 서울에 왔다. 재무부 차관이었다. 
그는 신임 대통령이 김영삼 정부가 약속한 개방 계획을 그대로 실행할 것이라는 서약을 받았다. 
그 뒤 일주일 만에 IMF가 달러를 수혈해주기 시작했다. 
많은 한국인에게 망각의 화면 속으로 사라져버린 얘기다. 
하지만 미국이 화를 내면 어떤 재앙이 닥친다는 것을 그때처럼 절감한 적은 없었다. 
미국과 일본의 연동작전이 처음부터 계획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버릇 나쁜 망아지를 닮은 한국을 길들이기 위해 미·일 간에 어떤 비밀대화가 오갔는지는 
그 뒤 많은 증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미국이 화를 폭발시키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고 여러 단계를 거친다. 
처음엔 자기네 요구 사항을 웃는 얼굴로 설명한다. 그것도 다양한 통로를 이용한다. 
대답이 시원치 않으면 당사자들을 초청해 현장 견학을 시켜주며 설득한다. 
한 번도 공개하지 않던 괌의 사드 기지를 한국 기자들에게 보여주는 식이다. 
그래도 풀리지 않으면 슬슬 위협을 가하며 부분적인 타협을 시도한다. 
1980년대 무역보복을 하면서도 뒤로는 서로 이득이 되는 거래를 하는 것이다. 
이 계단을 넘어설 때까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마지막엔 IMF 사태로 번지는 것이다.

지금 사드발(發) IMF란 상상할 수조차 없다. 
기껏 중대 규모의 부대 배치 문제로 미사일 방위청장까지 서울에 달려온 것을 보면 미국은 아직 웃으며 설득하는 단계이다. 
이런 인내와 설득의 시간이 얼마나 더 갈지는 모르지만, 어쩌면 자기네 국토와 국민을 지켜주려는데 
한국이 왜 이러느냐는 불만이 곧 터져 나올 듯하다.

우리는 중국의 보복만 걱정하고 미국은 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사드 배치를 반대하고 나섰던 새누리당 경북·대구 출신 국회의원 21명이나 중국으로 쫓아간 더민주당 6인방도 
미국은 아예 안중에 없었다. 
워싱턴을 찾아가 사드의 진실이 뭔지, 한반도에 꼭 필요한지 되묻고 자신들의 반대 논리를 설명하지 않았다. 
주한미군사령관을 국회에 불러 미군의 생각이 무엇인지도 묻지 않았다. 
처음엔 전자파 괴담에 휩쓸리다 그게 먹히지 않자 중국과 관계를 걱정하고 나섰다.

오바마 대통령이 석 달 전 히로시마원폭기념공원을 방문했을 때의 화면을 보라. 
그의 곁에는 핵전쟁에 대비해 24시간 대통령을 수행하는 핵가방을 든 비서가 있다. 
원자폭탄 피폭지에는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다. 
오바마는 또 히로시마를 방문하기 전 미국의 원폭 설비를 최첨단으로 업그레이드하는 1조달러 프로젝트에도 서명했다. 
핵 폐기를 외치며 노벨 평화상을 탔으면서도 국가 안보에는 개인 소신을 꺾은 것이다.

한국에서 사드 논란이 지속되더라도 미국은 인내하며 기다릴 것이다. 
오키나와 후텐마 공군기지 이전 문제도 10년 이상 결말을 짓지 못하고 있지만 미국은 기다리고 있다.

미국은 무너지는 유럽에 비해 떠오르고 있는 아시아 시장에 미국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보고 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그런 경향은 더 뚜렷해졌다. 
하지만 아시아를 중국의  압도적 패권 아래 놔둘 수는 없다는 판단이 지배적이다.

미국은 자신들의 '핵심적 이익' 중 하나인 한국을 지키기 위해 언제까지 참지는 않을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중국 외교를 잘못한 것은 다 알고 있다. 
그게 밉다고 미국 쪽을 쳐다보지도 않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중국의 보복을 무서워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미국이 화를 낼 줄 모르는 나라라고 오판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