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회평 논설위원
1980년대 중후반 일본 경제는 말 그대로 욱일(旭日)의 기세였다. 막대한 경상수지 흑자로 쌓은 달러를 들고 미국 자산 쇼핑에 나섰다. 미쓰비시가 1989년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록펠러센터를 사들인 것을 시작으로 그해 소니가 컬럼비아 영화사를, 이듬해 마쓰시타가 MCA를 인수했다. 도쿄 23구(區) 땅값으로 미국을 송두리째 살 수 있다는 호언도 떠돌았다. 미국 언론은 ‘제2의 진주만 습격’이라며 경계심과 열패감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일본경제 거품이 꺼지면서 미쓰비시가 7년 만에 록펠러센터를 반값에 넘기는 등 줄줄이 헐값에 매물로 나왔다.
20∼30년이 지나 비슷한 장면이 반복되고 있다. 이번엔 중국이다. 차이나머니는 최근 몇 년 닥치는 대로 기업을 쓸어담고 있다. 시장정보 업체 딜로직이 집계한 올해 1~9월 중국의 글로벌 M&A는 601건, 1739억 달러(약 199조 원)로 1년 새 금액이 68% 늘었다. 2008년 이후 줄곧 세계 1위였던 미국마저 제쳤다. 기업쇼핑 리스트엔 세계 최대 종자업체 스위스 신젠타, 118년 역사의 독일 1위 산업용 로봇 업체 쿠카도 들어 있다. 지난 주에는 글로벌 호텔체인인 힐튼이 하이난 항공그룹의 손에 넘어갔다. ‘M&A 굴기’ 이면에는 내수시장에서 챙긴 돈으로 투자를 다원화하면서 단기간에 선진업체의 브랜드와 기술력을 취하려는 중국 정부·기업의 의도가 깔려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며 차이나머니에 반색했던 서방국들도 중국의 과도한 식탐에 낯빛을 바꾸고 있다. 미국·영국·호주 등에서 중국 자본을 노골적으로 배제하는 조치가 잇달고 있다. 기술 유출과 안보 위협 등의 이유로 최근 1년여 사이 11건, 400억 달러의 중국발 M&A가 제동이 걸렸다.
올 들어서만 37개 기업을 중국에 내준 독일은 지난 24일 반도체 장비회사 아익스트론 인수 승인을 철회했다. 지그마어 가브리엘 독일 부총리는 “중국 기업과 불공정한 투자 경쟁을 바로잡는 데 유럽이 힘을 합쳐야 한다”고 한발 더 나아갔다. 1895년 독일 황제 빌헬름2세가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2세에게 “유럽 문명을 파괴하려는 아시아인들에 맞서 단결하자”고 했던 ‘황화론(黃禍論)’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중국을 한사코 밀어내려 해도 글로벌 M&A 시장에서 당장 그를 대체할 ‘큰손’이 안 보인다는 것이 유럽의 딜레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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