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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석의 시간여행]김옥균과 이준용의 운명

바람아님 2017. 2. 20. 23:22
동아일보 2017.02.20 03:01


김옥균(왼쪽)의 암살과 유해 송환 이후 고종의 장조카 이준용은 왕권 위협 1순위로 지목돼 결국 해외로 추방당했다.
‘시신을 실은 중국 군함이 월미도에 도착. 조선 배에 옮겨 싣고 서울로 출발.’(고종실록 1894년 3월 9일자·이하 음력)

중국 상하이에서 피살된 김옥균이 조선에 송환되었음을 알리는 경기도 관찰사의 보고다. 갑신년에 정변을 일으키고 일본 배로 인천항을 떠난 김옥균은 갑오년에 중국의 호송을 받아 주검으로 출발지에 되돌아왔다. 10년 만의 귀환이었다. 그를 실은 배는 한강을 거슬러 올라 양화진에 유해를 부려놓았다. 동족 암살자는 처벌받지 않고 같은 배로 귀국해 충신으로 환영받았다.

그날 광화문 안팎은 조정의 각부 대신들이 국왕에게 일제히 올리는 연명 건의로 분주했다.


“이 역적은 천하고금에 다시없는 흉악범으로서, 온 나라 사람 누군들 그의 사지를 찢고 살점을 씹으려 하지 않겠나이까. 외국에 나가 목숨을 부지하여 오랫동안 천벌을 받지 않았으므로 여론이 갈수록 들끓었습니다.”

여기서 여론이란 고위 관리들의 생각일 수는 있어도 만백성의 통일된 의견이라 단정하기는 어렵다.

영의정과 좌의정은 시신을 압송한 처사를 자평한다. 그리고 “대역적에게 대역죄를 적용하여 후세에 반역을 음모하는 역적들이 두려워하게 하소서”라고 건의한다.


왕은 답한다. “경들의 간절한 청은 당연한 것, 아뢴 대로 윤허한다.” 이어서 대사헌과 대사간에서 형벌의 방법으로 능지처참을 건의한다. 왕은 또 대답한다. “공분(公憤)으로 보아 마땅한 건의로다.”

국왕의 뜻을 받들어 의금부에서 형벌 집행계획을 보고한다. 능지처참이요, 가산은 몰수. 집은 허물어 연못으로 만든다…. 사람들은 그를 동정하기보다 애써 저주했다.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내우외환의 시기에 민심을 다잡아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감은 왕정도 마찬가지였다.


국왕은 역적의 괴수를 도륙하여 잡아왔음을 종묘에 고하고, 이 쾌거를 기념하여 사면령을 내리면서, 다시는 반역하는 일이 없어야 함을 주지시켰다(실록 4월 27일자). 그 사이 동학의 기세가 거세져 전라도를 장악하고 충청도로 넘어가는 시점이었다. 일본 정부가 중국과의 전쟁을 최종 결단하는 때였다.

내전과 외전이 뒤엉킨 그해의 끝자락, 정부 내각이 다시 한목소리로 왕에게 아뢰었다. “억울하게 죄를 입은 사람들을 풀어주고 죽은 자는 벼슬을 회복시키라는 하명에 따라, 조사 보고하오니 결재 바랍니다.”


육신이 사라져버린 후에 김옥균은 죄의 사함을 받고 생전의 관직이 회복되었다. 열 달 사이의 조변석개라 할까.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세가 굳어가던 때였다. 김옥균과 함께 망명했던 서광범은 갑오경장의 물살을 타고 무사 귀국해 법무대신에 임용되었다. 다음 해 국왕의 장조카 이준용을 체포하여 고문하고 특별재판소에 올려 사형 판결을 이끌어내는 지휘자 역할을 했다.

대원군의 맏손자인 이준용은 고종 임금에게 현존하는 최대 정적(政敵)으로 간주되었다. 그는 한 해 뒤 일본으로 추방됨으로써 목숨을 보존했다. 그리고 작은아버지 국왕이 하야하고 나서 귀국했다. 그 10년 사이 나라는 거의 망해 있었다.


박윤석 역사칼럼니스트·‘경성 모던타임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