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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1300년 동안 도굴 막아낸 측천무후 무덤의 비밀

바람아님 2017. 2. 11. 23:06
조선일보 : 2017.02.11 03:04

[김두규의 國運風水]

풍수사들이 지도자들의 선영과 생가를 답사하는 일은 옛날에도 있었다. 무슨 까닭인가? 제왕지기를 읽어내기 위함이었다. 나라를 번영시킬 진정한 지도자를 알아내기 위함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그의 풍수관을 보면 그 사람됨을 읽어낼 수 있다는 전제에서이다. 중국 여자 황제 측천무후(624~705)의 이야기이다.

측천무후의 음란함은 전무후무했다. 황제가 된 뒤에 수많은 남첩을 거느리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당시 신하 주경측이 "폐하께서 총애하는 장역지와 장창종으로도 이미 충분한데 최근 후상 등이 자신의 성기가 크다며 폐하의 시봉을 들고 싶다는 말을 한답니다"는 간언을 올렸을까! 측천무후의 음란함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학자가 동의한다. 주술에 빠져 명숭엄이라는 마법사를 가까이 두기도 했다. 또 여성 강장제를 즐겨 찾아 돌팔이 약장사 풍소보를 궁궐로 끌어들여 설회의라는 중으로 변장시킨 뒤 권력을 휘두르게 하였다. 이것은 여인의 사생활이기에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여인의 머리에 해당하는 북쪽 산(사진 위)에는 측천무후의 묘가, 남쪽에는 좌우로 봉긋하게 서있는 여인의 두 젖가슴과 같은 쌍유산(雙乳山)이 자리하고 있다. / 김두규 교수
음란하였으나 그녀는 위대한 통치자였다. 역사상 여자 임금이 더러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부모나 남편의 유고로 인해 권력을 승계한 경우이다. 측천무후는 이들과 달랐다. 말단 재인에서 출발, 후궁을 거쳐 황후가 되었고 마지막에는 황제가 되었다. 또 남편(고종)의 나라 당(唐)을 없애고 주(周)나라를 세웠다.

황제로서 그녀는 존경받을 만했다. 첫째, 인재를 발굴하고 간언을 용납했다. 앞에서 소개한 주경측의 불경스러운 발언도 벌주지 않았다. 둘째,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652년 380만호의 인구가 705년 615만호로 증가하였다. 셋째, 여성과 약자 보호 및 문화 융성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넷째, 국가 안보에 힘써 당태종 때보다 더 많은 영토를 확보했다. 고구려·백제가 멸망한 것도 그녀의 집권 때였다. 백제의 패장 흑치상지를 중국에서 받아준 것도 그녀였다.

풍수에서 그녀는 어떤 업적을 남겼을까? 첫째, 그녀는 도읍지를 관중[西安]에서 낙양으로 옮겼다. 풍수상 관중이 지기가 쇠했다는 이유에서였지만 실제로는 땅이 좁고 인구는 많아 새로운 도읍지가 필요함을 안 것이다. 안다고 모두 실천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상 많은 통치자가 천도를 시도하지만 대부분 기득권 세력에 의해 좌절된다.

둘째, 자신과 남편의 무덤 입지 선정에서 보여준 탁월함이다. 당대 최고의 풍수사 원천강과 이순풍을 활용했다. 이들이 택한 땅은 여인이 대지 위에 누워 있는 형국의 길지였다. 무덤이 자리하는 북쪽 산이 머리 모양이고 남쪽에 좌우로 봉긋하게 솟은 산이 여인의 젖가슴 형상이었다. 그녀는 평지에 관곽을 놓고 흙을 쌓아올리는 기존의 무덤 형식을 버리고 산을 뚫어 그 속에 관곽을 놓는 이른바 산을 능으로 삼는 '산릉(山陵)' 제도를 택했다. 이를 통해 공사 기간과 경비를 대폭 줄였다. 무덤이 조성된 산은 흙산이 아닌 돌산이었다. '돌산에 장사 지내지 말라'는 풍수 금기를 무시하고 땅의 아름다움과 견고함을 택하였다. 또한 광중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돌로 메우고 그 틈을 쇳물로 때운 뒤 입구를 완벽하게 위장했다.

반란군 지도자 황소가 40만 대군을 동원하였으나 도굴에 실패한 것을 포함, 17번의 도굴 시도들이 헛되었다. 20세기 초 국민당 소속 손련중 장군이 폭약으로 깨뜨리고자 하였으나 실패했다. 그리하여 1300년 동안 측천무후의 무덤은 도굴되지 않았다. 후세 풍수가들은 이러한 위대한 여성 지도자를 "살아서 천하를 정복하고, 죽어서 역사를 정복하였네!(生前征服天下, 死後征服歷史!)"라고 찬양했다.

김두규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