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活文化/그때그일그사람

[이광표의 근대를 걷는다]베버 신부와 '고요한 아침의 나라'

바람아님 2017. 2. 9. 23:22
동아일보 2017.02.09 03:04


독일인 베버 신부가 1915년 출간한 한국기행문 ‘고요한 아침의 나라’(왼쪽)와
1925년경 그린 ‘금강산 만물상’.

1973년 봄, 파독 광부 출신의 유학생 유준영은 독일 쾰른대 도서관에서 ‘한국의 금강산에서’란 책을 읽게 되었다. 독일 오틸리엔 수도원장이었던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1870∼1956)가 1927년에 쓴 독일어 책. 거기 조선시대 화가 겸재 정선의 그림 3점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한국미술사 박사논문을 준비 중이던 그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유준영은 곧바로 수도원에 정선의 그림이 있는지 수소문했다. 하지만 “없다”는 답만 돌아왔다. 2년 뒤인 1975년 3월, 그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안고 뮌헨 인근의 오틸리엔 수도원을 찾았다. 놀랍게도 거기 정선의 그림이 있었다. 그것도 한두 점이 아니라 아예 화첩 형태였다. ‘금강산내전도(金剛山內全圖)’ ‘압구정도’ ‘함흥본궁송도(咸興本宮松圖)’ 등 21점이나 들어 있는 ‘겸재 정선 화첩’이었다.


이 그림들을 수집해 오틸리엔 수도원으로 가져간 사람은 베버 신부였다. 그가 한국을 처음 방문한 것은 1911년. 서울 수원 해주 공주 등지를 둘러보면서 한국인의 일상과 종교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 기억을 담아 1915년 독일에서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출간했다. 그는 한국 여인의 장옷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부드럽고 연한 초록색 비단 장옷의 붉은 옷고름은 펄럭이는 옷자락 사이에서 얌전하게 내비치어 그 보색 대비가 마술처럼 조화를 이룬다.’


베버 신부는 1925년에도 한국을 찾아 금강산을 기행했다. 이때 정선의 그림들을 수집해 화첩으로 꾸민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또 무비카메라를 갖고 와 ‘한국의 결혼식’ 등의 기록영화를 촬영했다.

정선 화첩은 1975년 이후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다. 1990년대 독일 유학 중이던 왜관수도원 소속 선지훈 신부는 오틸리엔 수도원 측에 화첩의 한국 반환을 조심스레 요청했다. 하나둘 준비작업이 진행됐고 드디어 오틸리엔 수도원의 결단을 이끌어 냈다. 2005년 10월, ‘겸재 정선 화첩’은 우리나라에 돌아왔다. 오틸리엔 수도원이 경북 칠곡의 왜관 수도원에 영구 대여한 것이다. 조국을 떠난 지 80년 만의 귀환이었다.


오틸리엔 수도원은 화첩을 경매에 부치게 해달라는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회사의 거듭된 요청을 물리쳤다고 한다. “한국의 문화유산을 돈 받고 거래하고 싶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벽안(碧眼)의 이방인 베버 신부로부터 시작된 한국과의 인연, 벌써 100년이 넘었다.


이광표 오피니언팀장·문화유산학 박사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