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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 사물극장] [4] 시인 김수영의 '우산'

바람아님 2017. 7. 21. 09:20
조선일보 2017.07.20. 03:10

우산은 비를 발명한다. 우리는 비의 악행과 심술궂음을 피해 우산 속으로 도피한다. 찾아보니, 우산은 4세기쯤 나왔다. 우산을 뜻하는 영어 '엄브렐러(umbrella)'의 어원은 이탈리아어 '그늘(umbra)'이다. 우산은 중국에서 나와 인도와 베네치아를 거쳐 서쪽으로 건너간다. 우산은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것, 즉 빗방울과 햇빛을 막아 피난처를 제공한다. 비 오는 날 연인에게 우산 속은 화엄(華嚴) 우주와 같이 밀회의 아늑함을 선사한다. 그러나 모든 도구는 사람의 욕망과 필요에 따라 그 쓰임이 변용되고 확장되는 법이다.

김수영(1921~1968)이 쓴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어린 놈이 울었고 비오는 거리에는 사십 명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운운하는 시 '죄와 벌'을 처음 읽었을 때 '이건 뭐지?'하는 기분이 들었다. 세상에나! 김수영의 아내 김현경의 회고에 따르면, 이건 1958년 가을에 있었던 일이다. 광화문에서 과외 공부를 하는 큰아들을 기다리며 부부는 조선일보사 모퉁이 극장에서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길'이라는 영화를 본다. 다섯 살인 둘째 아들도 함께였다. 영화를 보고 나온 김수영이 거리 한가운데서 제 아내를 때려눕힌다. 그는 주사(酒邪)가 심했지만 그날은 술도 마시지 않은 터였다. 시인은 나중에 우산을 '범죄의 현장'에 두고 온 것, 혹시 그 현장에 아는 이가 있었을까, 하고 어리석은 걱정을 한다. 이 괴팍한 소동이 지나고 다섯 해 뒤 1963년 10월에 '죄와 벌'이 나온다.


김수영은 왜 제 아내를 우산으로 후려쳤을까? 우선 장남의 과외 교사가 신통치 않아 시인의 마음이 불편한 데다 영화 속 배우 줄리에타 마시나와 앤서니 퀸의 남루하고 엇갈린 사랑과 욕망에 오쟁이 진 과거의 제 처지를 투사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시인은 돌연 감정이 격앙되어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것.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시인이 제 폭력 행사를 추악한 '범죄'로 인식했단 점이다. 그렇더라도 비를 가리는 우산을 가정 폭력의 도구로 바꾼 행위는 옳지 않다. 그가 문학사에 남을 만큼 위대한 시인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