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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의 향연] '쓰앵님'은 있는데 '선생님'은 안 보인다

바람아님 2019. 2. 14. 07:30

(조선일보 2019.02.14 권지예 소설가)


드라마든 현실이든 학교가 없어… 그 많은 선생님들 다 어디로 갔을까
함께 교직 몸담았던 동기들, 더이상 미련없다며 대부분 '명퇴'


권지예 소설가권지예 소설가


"저를 전적으로 믿으셔야 합니다, 어머님."


"네, 쓰앵님!"


수능 후 연말연시 입시 철에 크게 히트친 한 TV 드라마 주인공들의 대사가 요즘 유행어로

패러디되고 있다.  입시 코디네이터인 '쓰앵님'은 예사 선생님이 아니다.


최고 명문대 합격을 책임지며 몸값으로 수억에서 수십억원을 호가하는 드라마 속 인물이다.

상류층 어머니들에게는 신이자 교주다. 대한민국 청년들은 성년이 되기 전에 살아서 지옥을 거치게 되는데,

이름하여 입시 지옥. 이 지옥에서도 이 '쓰앵님'의 간택을 받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

서민들이 보기엔 과장된 드라마로 보이지만 70%는 현실이라 말하는 인터뷰도 본 적 있다.

복잡한 우리나라 대입 전형으로 실제로 사교육 컨설팅비로 많은 돈을 지불하는 계층이 존재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드라마든 현실이든 이제 학교가 잘 보이지 않는다. '쓰앵님'은 있어도 '선생님'은 안 보인다.

그 많은 '선생님'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소설가가 되기 전 20대에 교직에 몸담았던 터라 내게는 아직 교유하는 소위 첫 발령 동기 교사 친구들이 있다.

그 친구들이 근래에 거의 다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교권도 추락하고 더 이상 학교와 교직에 의미와 미련도 없다는 말과 함께.


나는 뒤늦게 넷플릭스를 통해 이 드라마를 몰아서 끝까지 보고 나서, 우연히 최신판 드라마 '빨강머리 앤' 시즌 1·2를

연이어 보게 되었다. 열한 살짜리 빨강머리의 불쌍한 고아 소녀가 캐나다 에이번리 섬마을 초록 지붕 집의

늙은 커스버트 남매에게 실수로 입양되어 성장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다.

처참하게 살았던 이 어린 고아가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삶을 바꾸는 건 밝고 풍부한 상상력의 힘이다.

원작은 1908년에 쓴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소설이다.

드라마는 앤의 어린 소녀 시절에서 끝났지만, 속편 '에이번리의 앤'을 읽게 되면 에이번리로 돌아와 교사가 된

처녀 시절의 앤을 만날 수 있다.

초등학교 여선생님에게 감화되어 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던 이 사랑스러운 소녀는 어떤 선생님이 될까.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교사로 부임한 수업 첫날, 들뜬 앤의 감회다.


"그래도 오늘 해낸 일은 클리피 라이트에게 A가 A라는 걸 가르쳤다는 거예요. 그 애는 그걸 몰랐거든요.

나중에 셰익스피어나 '실낙원'을 쓴 밀턴이 될지도 모르는 애를 처음 가르친다니 굉장하지요?"


앤은 아이의 잠재력을 믿고, 체벌 금지 신념을 지키려 하고, 상상력을 풍부하게 개발하는 교사다.

교사로서 첫 일 년이 지나자 앤의 문학적 재능을 사랑하는 앨런 목사의 부인은 말한다.


"난 네가 대학에 갔으면 좋겠구나. 앤, 하지만 못 간다고 해도 속상해하지는 마라.

어디에 있든 우리는 우리의 삶을 만들어 가니까. 대학은 그걸 좀 더 쉽게 해줄 뿐이지.

무엇을 얻는지가 아니라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에 따라서 넓어지기도 하고 좁아지기도 하지.

인생의 풍요로움과 충만함에 온 마음을 여는 법만 배운다면 인생은 풍요롭고 충만할 거야.

여기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사실 인근 도시의 교사 양성 전문학교에서 수석 졸업에 장학금까지 탄 앤은 레드먼드대학에 진학해서 문학을 공부하려 했었다.

아버지 같은 매슈 커스버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고향에 혼자 남게 된 마릴라 커스버트를 부양하기 위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초등학교 교사로 고향으로 돌아왔던 거다. 외로운 마릴라 아주머니가 절친과 함께 살게 되고 유산과 함께

친척의 두 아이를 맡게 되자 대학 진학을 위해 다시 고향을 떠나며 아이들과 학부모들과 눈물로 헤어진다.


앤은 2년 동안 열심히 성실하게 일했고 실수를 하면서 교훈을 얻었다. 보람도 많이 느꼈다.

앤이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학생들은 앤에게 더욱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다정함, 자신을 제어하는 방법, 순수한 지혜, 천진난만한 마음 등…. 앤은 아이들에게 굉장한 '포부'는 불어넣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앤은 말로 된 가르침보다 따뜻한 마음으로 앞으로 멋있고

아름답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출세와 성공의 비즈니스 수단으로 전락한 이 시대의 교육.

아무리 비싼 '쓰앵님'도 행복한 삶을 보장할 순 없다.

삶을 가르치는 앤 선생님이라면 이렇게 말할 텐데.

 "세상은, 삶은 생각대로 되지 않아요.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져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는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