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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 사물극장] [88] 샤를 보들레르와 '말년의 수첩'

바람아님 2019. 3. 8. 08:58
조선일보 2019.03.07. 03:10

어쩌면 세상은 침대를 바꾸고 싶은 마음을 품은 병자들이 누워 있는 병동(病棟)이다. 그 병동에서 어떤 이들은 아름다운 것에 사로잡힌 채 백일몽같이 살다 퇴장한다. 불규칙성, 의외성, 놀라움, 경이로움을 바탕으로 하는 아름다운 것들은 대체로 쓸모가 없다. 랭보나 샤를 보들레르(1821~1867), 소월이나 윤동주 같은 이들은 그런 쓸모없는 아름다움에 속수무책으로 빠져들었던 족속인지도 모른다. 보들레르는 26세 때 시집 '악의 꽃'으로 세상을 소란으로 뒤흔들었다. 시집이 외설로 가득 차 있다고 정부는 그를 기소했다.

아버지가 62세, 어머니는 28세일 때 보들레르는 파리에서 태어났다. 6세 때 아버지를 잃었다. 어머니가 육군 소령과 재혼하자 양부와 불화하며 자라났다. 1842년 보들레르는 21세로 법적 성인의 지위를 얻는다. 이는 선친 유산을 제 마음대로 쓰게 되었다는 뜻이다. 1844년 8월 가족회의에서 금치산자 선고를 받기 전까지 금화 10만프랑을 물 쓰듯 썼다. 2년 남짓 동안에 유산 절반이 날아갔다. 보들레르는 단역배우 출신의 혼혈 여인 잔 뒤발과 파리의 호화 숙소인 피모당 호텔에서 거주하며 비싼 물건들을 마구 사들였다.

매달 공증인에게 200프랑을 받는 게 고정 수입의 전부였지만 모자, 구두, 넥타이 등을 사고 액자, 판화, 골동품 구매에 돈을 썼다. 사치와 방탕으로 쌓인 빚더미 때문에 통속 드라마를 썼지만 실패했다. 반신불수와 실어증을 앓고 재정 상태는 최악에 빠졌다. 보들레르는 말년의 일상을 적은 수첩 한 권을 남겼다. 이 수첩엔 1861년 7월에서 1863년 11월까지의 부채 명세와 돈거래의 기록들, 누군가의 주소들, 소소한 약속들, 집필 계획, 불쑥 솟구친 단상들이 적혀 있다. 천재 시인이었으나 인생 실패자였던 보들레르는 생활고에 매독과 중풍까지 겹쳐 시난고난하다가 46세로 세상을 떴다.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