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2019.05.29. 03:03
한 척의 핑크색 배가 떠 있다. 아니, 떠 있다기보다는 번잡한 교차로 한복판에 높이 들려져 있다. 배의 옆구리에 쓰인 ‘진실을 말하라’라는 굵은 검정 글씨가 유독 도드라져 보인다. 사람들이 에워싸 그 배를 보호하고 있다. 이따금 누군가가 배 위로 올라가 무슨 말인가를 한다. 유명배우 에마 톰슨도 그중 하나다. 그 모습을 며칠 지켜보던 경찰이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배를 견인해 간다.
지난달 런던에서 있었던 일이다. 핑크색 배는 영국 정부에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고 ‘기후 긴급사태’를 선포하라고 요구하는 ‘절멸 저항(Extinction Rebellion)’이라는 환경단체가 동원한 진짜 배였다. 그들은 인간의 실존을 은유하는 데 자주 쓰이는 배의 이미지를 기후변화와 생태계 파괴로 인해 절멸의 위기에 처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에 대한 은유와 상징으로 삼았다. 배의 측면에 쓰인 ‘진실을 말하라’는 그 실존적 위기를 직시하고 인정하며, 생명의 배가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도록 하라는 요구였다.
저항을 주도하는 것은 젊은이들이다. 2018년 8월, “기후변화를 위한 수업 거부”라고 쓰인 종이판을 들고 스웨덴 의사당 앞에 쪼그려 앉아 세계인의 이목을 사로잡은 열다섯 살짜리 소녀 그레타 툰베리 같은 사람들이 그들이다. 자신들의 미래를 기성세대가 보장해주지 않으니 직접 나선 것이다. 집에 불이 붙어 무너지려고 하는데 서로의 입장 차이 때문에 불 끄기를 미루는 것은 공멸의 길로 가자는 것이라는 소녀의 말은 무시하기 힘들다. 미래가 없을지 모른다며 ‘과학에 귀를 기울이라’는 소녀의 절박한 목소리는 한가로운 소리가 아니다.
젊은이들이 우려하는 파국은 생각보다 훨씬 더 빠르게 다가올지 모른다. 우리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드는 심각한 실존적, 묵시적 은유로 핑크색 배를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다. 그나마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을 때 일말의 개선이나 치유는 통하는 것일 테니까.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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