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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인문학] 한류 속에서 인류를 본다

바람아님 2019. 6. 7. 08:52
디지털타임스 2019.06.06. 18:26

      

조만수 충북대 프랑스언어문화학과 교수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였다. 이제 <기생충>은 세계 도처에서 개봉될 것이다. 한편 BTS는 웸블리구장에서 6월 1~2일 이틀 동안 12만 관객과 함께 했다. 한류의 파고가 장르를 가리지 않고 꽤나 높고 거세다. 같은 시기, 한류를 조명하는 매스컴의 요란한 카메라 플래시로부터 멀리, 캐나다 퀘벡주 몬트리올에서 개최된 공연예술축제 '트랜스아메리카 페스티벌'(FTA· 5. 22-6.4)에서는 네델란드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한국인 무대예술가 구자하가 <쿡쿠Cuckoo>라는 작품을 선보였다. 생키엠쌀이라는 그리 크지 않은 중극장을 만석으로 채운 300명 정도의 관객들은 아직은 그리 알려지지 않은 이 젊은 아티스트에게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국제적으로 알려졌든, 그렇지 않든, 관객이 십수만명이든 수백명이든간에, 관객들은 예술작품 속에서, 그리고 예술작품이라는 커다란 카테고리의 하부 범주로서 한국예술 작품 속에서, 도대체 무엇을 보고, 무엇에 반응하는 것일까?


오래전 국악인 박동진씨가 TV광고를 통해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라고 단호하면서도 진지한 어조로 선언했듯이, 임권택이 <취화선>으로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을 때 '우리'가 매우 기뻤던 것은 세계인들이 '좋은 우리 것'에 공감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BTS의 이번 월드 투어의 제목은 '너 자신을 사랑하라, 너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라'(Love yourself Speak yourself)였다. '우리'가 아닌 '나'를 이야기하는 것, '한국인으로서의 나'가 아니라, '나'라고 하는 한 명의 한국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집단 안에서 주어진 정체성이 아닌, 나의 정체성들의 다양한 합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사회적 정체성, 그것이 오늘의 한류, 그리고 보편적인 인류의 예술, 다문화 사회에서의 예술이 말하고 반응하는 방식의 출발점이다.


구자하가 몬트리올에서 공연하던 같은 날, 서울의 엘지아트센터에서는 퀘벡 출신의 무대예술가 로베르 르파쥬가 <887>이라는 작품을 공연하고 있었다. 두 공연의 공통점은 단 한명의 배우에 의해서 공연되는 모노드라마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한 명의 배우는 작품의 작가, 연출가이면서 작품화된 이야기의 현실 속에서의 주인공 자신이라는 점이다. <쿡쿠Cuckoo>는 전기밥솥 상표 이름이다. 그리고 직접 요리Cook해서 밥먹고 살아야하는 구Koo씨 자신을 지시하기도 한다. 로베르 르파쥬의 <887>은 예술가 자신이 어린 시절 살던 집의 번지 수이다. 예술 작품들이 개인의 경험을 소재로 하여 이를 허구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종의 프리젠테이션 형식으로 이루어진 이들 작품들은 허구화되지 않은 작가의 삶의 내용이 그대로 보여진다는 점에서 둘 다 일종의 다큐멘터리 형식을 띄고 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 자신이 다른 배우로서 대체된다면 의미를 잃고 만다.


현실 속의 '나'에 대해서 말할 때, 그 이야기가 타인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나의 '좋은' 성취와 활약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상실'과 '아픔', '실패'에 관한 것일 때이다. TED류의 프리젠테이션 강연이 실패에 대해 말할 때는 반드시 이를 딛고 다시 일어선 성공담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동일한 프리젠테이션 형식을 지니고 있어도 연극은 성공으로 회복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의 '아픔'에 대해 이야기한다. 주인공이 겪는 이 고통을 고대 그리스인들은 '하르마티아', 즉 '결점'이라 불렀다. 구자하는 서울 지하철 스크린도어 정비작업 중 사망한 젊은 노동자의 이야기를 절친했던 친구의 죽음과 함께 이야기한다. 르파쥬는 영어권 캐나다에서 차별받는 불어권 퀘벡의 아픈 기억을 887번지에서 살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과 변주시킨다. 몬트리올의 관객이 구자하에게, 그리고 서울의 관객이 르파쥬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은 바로 이 아픔을 공감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한국사회와 퀘벡사회가 경험한 역사적·사회적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삶의 내용으로 구체적으로 표출되며, 관객이라는 또 다른 개인의 삶 속에서 다시 살아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육체적으로 함께 느낀다는 문자적 의미 그대로의 공감(公感)일 것이다.


아픔을 느끼는 한 개인과 그 개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타자는 하나의 몸, 즉 공동체를 이룬다. 이 공동체는 '한국'이라는 지리적, 국적상의 단위에 국한되지 않는다. BTS라는 한국 아트스트들과 그들에게 열광하는 외국인 팬들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은 '아미'라는 하나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다. 공연자와 관객이 하나의 정체성을 형성한다면 그들은 한 순간 함께 한국인이며, 또 다른 맥락 속에서 함께 퀘벡인이고, 또 다른 순간에는 다른 정체성을 형성한다. 몬트리올 FTA축제에 참여한 독일극단 '리미니프로토콜'은 그들 역시 다큐멘터리 연극으로 우리의 몸을 이번에는 쿠바인들의 것으로 만든다. <할머니, 하바나의 트럼본>이라는 작품의 무대 위 4명의 쿠바 젊은이들은 전혀 훈련된 배우가 아니다. 그들은 쿠바 혁명에 참여한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둔 손자 손녀 세대의 평범한 젊은이들이다. 그들은 무대 위에서 그들 할머니, 할아버지의 옷을 입고, 할머니, 할아버지의 몸을 빌어 그들의 '실패한(?)' 혁명의 세월을 다시 살아본다. '실패'에 몸을 내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연극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이 연극의 끝에서, 비록 카스트로 세대의 기나긴 투쟁이 가난으로 종결된 것이라 할지라도, 가난으로 이끄는 현실에 맞서서 더 나은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그들의 열정이 현재 세대의 문제와 다른 것이 아님을 토로한다. 그리고 북미 중산층을 이루고 있는 극장의 관객들은 카스트로 세대의 삶의 도전이,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부의 재분배 문제에 직면한 자신들의 삶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기에, 이들 네 명의 쿠바 젊은이들에게 열정적인 박수를 보낸다. 관객들은 스스로, 이미 실패한 것으로 역사적으로 판명되었지만, 결코 무의미했다고 평가할 수 없는, 쿠바인들이 되어 버린 것이다.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예술작품 속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볼까? 그것은 그들 자신의 모습이다. 실패하여 아픈 몸인 그들 자신을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류(韓流) 속에서 그들은 인류(人類)를 보는 것이다.


조만수 충북대 프랑스언어문화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