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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향의인문학산책]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

바람아님 2019. 7. 28. 09:07

세계일보 2019.07.26. 21:37

 

품격 있는 보수 사망 소식에 충격 /
나이 들수록 내려놓을 수 있어야

“법으로는 무죄지만 인생살이에서는 무죄가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그것은 자기 촉으로 삶을 느끼고 살아가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참회의 말이었다. 남의 시선이나 법적인 마인드가 삶의 전부라 믿는 사람은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나는 그를 몰랐지만 그가 말을 하면 채널을 돌리지 않고 끝까지 들었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측면도 종종 있었지만 차분하면서도 분명한 그의 논리는 경청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정두언, 그는 품격 있는 보수였다. 그런 그의 사망 뉴스는 충격이었다. 그날 오전까지도 방송을 했단다. 그런 그가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글을 남기고 그렇게 떠난 것이었다. 그렇게 정치를 잘 알고, 자기 정치철학이 있고, 아직도 자기 자리가 있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극단적 선택을 했다고 하니 사적인 인연이 없었어도 왜 그랬을까 궁금했다.


언론에서는 우울증이라는데 대부분 우울증은 교통사고처럼 기습적으로 다가와 사고를 만드는 원인이라기보다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결과가 아닌가. 소화하기 힘들었던 삶의 이러저러한 요인이 우울증이 되고 마침내 자살에까지 이르게 만드는 것은 아닐는지. 21세기에는 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사람의 수보다 우울증으로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람의 수가 더 많을 것이라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한 친구는 어머니를 보내고 나서 우울증을 앓았다.

무엇보다도 사람 만나는 일이 죽기보다도 싫었단다. 취소할 수 없는 약속이 있는 날이면 아침부터 소주 한 잔을 마시고 출근했단다. 사람을 만나는 일이 가장 무거운 의무로 여겨졌던 그때 술기운을 빌려 그 의무를 이행했던 것이다. “그때는 그게 우울증이라는 것도 몰랐어. 그리고 6개월 뒤에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정신이 번쩍 나더라구.” 친구의 우울증은 그동안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감사하며 살아왔던 삶에서 방향전환을 하게 만든 터널 같은 것이었다. “그동안 그토록 추구했던 업적, 늘 신경이 쓰였던 인간관계, 그걸 위해 매일 일에 쫓기고, 사람에 쫓기고, 시간에 쫓겨 왔던 삶이 실재가 아니라 관념이었음을 알게 된 거지.”
이주향 수원대 교수 철학
갈피 모를 혼돈은 그전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는 몸의 싸인, ‘나’의 반란이다. 우리에게는 어느 정도의 상실을 소화해낼 수 있는 힘이 있다. 실직을 하고, 이별을 하고, 주식투자에 실패했어도 버틸 수 있는 이유다. 그러나 소화하기 힘든 상실도 있다. 오랜 세월 함께한 배우자의 죽음이나 중년 이후의 실직, 불면증, 불현듯 찾아든 질병, 그런 것들이 덮쳐 ‘나’를 짓누를 때 삶에서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때 너는 왜 그렇게 무기력 하느냐고 질책하거나, 힘내라고 재촉하는 것은 아무런 힘이 되지 않는다.
        

많은 것을 누렸던 사람일수록 상실감도 크다. 그 상실감은 우리가 살면서 느꼈던 힘에의 의지나 자부심 혹은 행복감에 그림자여서 버려야 하거나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버리려 할수록 늪이 되고 싸우려 할수록 힘이 빠진다. 그것은 어쩌면 심술을 부리는데 함께는 살아야 하는 가족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상실은 지금껏 내 인생의 별이었던 그것을 멀리 떠나보내고 이제 별이 없이 어둠의 터널을 통과해야 하는 시간이 왔음을 일러주는 운명의 신의 교지가 된다. 니체의 ‘아모르파티’(운명애)는 이 시기를 통과한 자의 고백이다.


트로트 가수로서 최고의 영광을 누리고 있는 장윤정씨가 한 매체에서 한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내려가야 할 때, 차근차근 잘 내려가고 싶다. 그래서 나를 밟고 올라가는 후배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고 싶다.”

나는 그녀가 어둠의 시간을 잘 통과했고, 잘 통과할 힘이 있구나 생각했다. 나이 들수록 중요한 능력은 업적에 집착하고, 젊음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내려올 수 있고, 내려놓을 수 있고, 작아질 수 있는 것이다.


그를 덮쳤던 삶의 무게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으로서 그의 선택의 잘잘못을 따지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인생살이에서는 무죄가 아니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섬세했던 영혼의 명복을 빌어주고는 싶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 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