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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혁신의 척후(斥候)

바람아님 2019. 12. 10. 07:59


중앙일보 2019.12.09. 00:33

 

정치스캔들로 얼룩질 연말연시
누추한 사이클에 무기력한 시민
세 개 혁신엔진 중 기업만 남아
포스코와 SK, 혁신로를 개척 중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
드디어 시작됐다. 이번에는 좀 이르다. 정권 후반기에 터져 나오는 내부 스캔들 말이다. 뇌물수수, 부정감찰, 소환장과 유서. 여기에 ‘논두렁 시계’ 시나리오의 주인공이 귀국했으니 엎치락뒤치락 공방전이 연말 정서를 들쑤실 것이다. 어떤 사건을 먼저 요리할까.


검찰 셰프가 논두렁 시계 건을 먼저 도마에 올린다면 문재인 레스토랑의 인기 메뉴인 ‘적폐청산’에 적격이다. 혹시 논두렁 시계에서 조작 흔적이 발견된다면 문빠부대와 친문(親文)의 공분은 연말연시 흐린 하늘을 찌를 것이다. 내부 스캔들을 양념처럼 섞어 부대찌개를 내놓는다면 광장은 다시 갈라진다. ‘스캔들’과 ‘논두렁’이 정의와 공정을 두고 격돌하는 사이 어느덧 봄이 오고, 여의도는 5개 정당으로 나뉘어 입 발린 소통정치를 약속할 것이다.


매 정권마다 반복되는 이런 누추한 사이클에 질린 지 오래건만, 피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 앞에서 무기력해진다. 젊은 세대에게 면목이 없다. 미래구상은커녕 삶의 여유도 주지 못하니 말이다. 정권마다 외치는 ‘혁신’의 유통기한은 고작 2년. 혁신을 혁신할 또 다른 세력을 갈구해도 이처럼 척박하고 위험한 정치토양에서 방탄조끼로 무장한 초인(超人)이 출현할 것 같지도 않다. 초인연습에 나선 야당의 장수들은 대체로 박근혜 흔적을 다 지우지 못했다. 2년 반의 실정(失政)을 만회할 길이 없는 여당 86세대는 초인 오디션에서 탈락해 스스로 소멸 직전이다. 복면가왕이라도 홀연히 나타나 ‘혁명’을 외친다면 모를까, 정치의 지리멸렬은 산조(散調) 가락으로 느릿하게 이어질 것이다.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혁신제작소는 정부, 학교, 기업이다. 1980년대 ‘미국의 침몰’이 엄습할 때 미국인들은 세 개의 혁신 엔진을 서둘러 재건했다. 세제개혁, 구조조정, 규제철폐, 그리고 주력산업의 변경. 수많은 굴뚝산업이 문을 닫았다. 평범한 봉급생활자들이 ‘다운사이징 아메리카’에 휩쓸려 실직 대열에 합류했고, 인적자본을 새로 정비한 사람들은 서비스, 금융, IT로 이동했다. US Steel은 문을 닫았고, 가전제품의 왕자 GE(General Electric)는 변신을 모색했다. 제록스(Xerox)처럼 망하거나 망할 대기업이 속출했다.


갱신의 몸부림에 대학이 화답했다. 학과와 학부 통폐합은 물론 군산(軍産)복합체의 요청을 받아들여 캠퍼스에 연구기지를 유치했다. 학문의 인문학적 본질도 중요했지만, 과학기술 헤게모니의 상실에 대한 위기감이 ‘기업가적 대학’을 가속화했다.

‘죽음의 10년’을 보내고 경쟁력을 회복한 미국인들은 레이건대통령에 대한 증오를 거둬들였다.


그게 바로 냉혹한 ‘신자유주의’의 모습이야! 이런 비난을 일단 유보하고 혁신의 실재성에 주목하고 싶다. 어쨌든 미국은 혁신을 실행했다. 수년간 비틀거린 한국엔 누가 혁신을 실천하는가? 정부? 글쎄, 정권에 짓눌려 찍소리도 못하는 정부 관료들이 무엇을 도모할 수 있는가? 성질 급해서 나대는 사람은 결국 유배 대상임을 이미 간파한 현실에서 누가 솔선수범할까.

대학은? 말하기 부끄럽지만 교수들은 문제 제기의 달인이지 해결의 전문가는 아니다. 교수회의는 지식을 뽐내는 담소장(talking shop)이다. 서로 다른 생존 원리를 장착한 상호 분리된 이질적 소립자(microsome)의 집합체에서 혁신은 위험의 다른 이름이다. 경계를 허물기보다 의사사회주의의 작은 오아시스에 안주하기를 즐긴다. 혁신을 외치느라 목이 쉬는 대학 총장은 그리 행복한 직업은 아니다.


남은 건 기업이다. 정부는 파산하지 않고 대학은 명이 길다. 기업은 항상 파산과 폐업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위험의 일상화, 혁신을 밥먹듯해야할 이유다. 현정권의 정책은 친기업, 반기업이 아니고 ‘무(無)기업’이라는 4차산업위원장의 진단은 적확하다. 기업과 경제에 대한 무지(無知)가 이토록 심한 정권을 보지 못했다. 정부 예산이 기여할 성장의 몫이 고작 5% 미만인데, ‘무기업’ 영토에서 저성장을 탄식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멸시를 받아도 혁신을 도모해야 하는 게 기업의 운명이다.


이런 때 시민 가치에 눈뜬 기업이 있다. 철강기업 포스코가 ‘기업 시민’을 선포했다. 돈과는 먼 이 낯선 용어가 혁신의 광맥을 품고 있음을 알아채려면 이윤의 무한질주를 멈추고 동시대인들을 둘러봐야 한다.

공감(共感)과 동정(同情)! 아담 스미스가 백 가지 인간 감정 중에 가장 고귀하게 꼽은 공존의 가치다. 이해 당사자와 고객, 넓게는 시민을 이롭게 만드는 이윤 창출의 오솔길을 개척하는 기업의 행로를 ‘혁신로(革新路)’라 불러 마땅하다.


지난 3일 포스코 ‘기업시민 페어’에 화답하듯 ‘사회적 가치’를 선포한 SK 최태원 회장이 우정 출연했다. 사회학자의 눈에 그는 이 시대의 사회학자였다. 사회적 쟁점을 해결하지 못하는 기업은 돈도 벌 수 없는 시대로 진입했다! 20세기 자본 논리를 바꾸려는 그의 도전장은 강연장 젊은이들을 열광시켰다. 희망이 재점등됐다. 두 개의 대기업, 혁신의 척후는 그래도 살아 있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