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동아일보 2014-01-21 일자]
요서와 내몽골 지방의 건조지대로, 초기 거란의 영역이었다. 광개토태왕이
즉위한 후 공격한 곳 중 하나다. 윤석하 사진작가 제공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崗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국강상광개토지호태성왕(國崗上廣開土地好太聖王)‘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國崗上廣開土地好太王)’.
모두 광개토태왕(대왕)을 기리는 칭호다. 영토를 크게 넓힌 위대한 통치가, 왕 중의 왕이란 뜻이 담겨 있다.
광개토태왕은 만주 일대를 지나 몽골 어귀까지 진출했다. 오늘날 중국 산둥 성의 면적은 15만 km². 연해주를 포함해 만주 일대가 약 150만 km²다. 일본 열도는 육지 부분만 약 37만 km²이고 한반도는 남북을 합쳐 22만 km²다. 이 영토의 크기를 고려하면서 고구려 영토를 가늠해 보라. 감동 그 자체가 아닌가.
414년 장수왕이 세운 광개토태왕릉비.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란 글자가 음각돼 있다. 윤명철 제공
광개토태왕은 위엄과 무공을 사방에 떨쳤다(威武振被四海). 탁월한 정복군주였다. 하지만 거기에만 머물지 않는다. 태왕은 그 이상의 존재다. 태왕이 널리(廣) 열어간(開) 땅(土)은 논밭 같은 토지가 아니다. 질서이고 문명이며 또한 역사다. 태왕은 고구려를 넘어 동아시아 전역을 경영한 위대한 정치가였다.
태왕이 391년 18세로 임금이 되었을 때 고구려는 위기 상황이었다. 서북방 국경에서는 선비족의 연나라, 거란과 자주 전쟁을 벌였다. 강성해진 백제는 남쪽 황해도 지역을 끈질기게 공격해 왔다. 흉년이 겹치는 바람에 경제난도 가중됐다. 불교는 아직 낯선 이데올로기였다. 안정과 함께 혼란도 불러일으켰다.
내부 통일, 대외 전쟁에서의 패배감 극복과 승리 쟁취, 원조선(고조선)의 영토 회복과 종족의 통일, 그리고 경제적 성장과 밝은 미래…. 시대가 젊은 태왕에게 내린 과제들이었다. 하나같이 국가 발전을 위해 꼭 이뤄야 할 것들이었다. 태왕이 세운 전략은 남달랐다. “수습이 아니다. 확장으로 위기를 돌파하자!” 태왕은 즉위와 동시에 전쟁을 감행했다. ‘비문’과 ‘삼국사기’를 토대로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보자.
‘즉위 첫해인 7월, 4만 대병력으로 예성강 일대와 개경 주변 지역을 점령했다. 9월에는 북상해 요서와 동몽골 사이에 거주하는 거란을 정벌했다. 포로로 잡혔던 백성들을 구출하고 요동을 경영하는 교두보를 차지했다. 10월에는 남진하여 백제의 최전방 기지이고, 해군의 주력 함대가 포진한 강화도의 관미성을 공격했다. 처절한 공방전 끝의 함락. 지금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해역을 안정적으로 확보함으로써 백제 수도권에 비수를 겨누게 됐다.’
고구려군은 산업이 발달한 덕택에 첨단무기로 무장할 수 있었다. 명실상부한 동아시아 최강의 군대. 태왕은 기동력과 파괴력이 강한 철기 병사를 전면에 내세웠다. 산악지대와 대평원, 초원과 삼림, 바다와 강 등 지형지물을 활용해 허를 찌르는 군사작전을 감행했다. 여기에 수군을 이용해 상륙작전을 벌였다. 그야말로 완전한 입체작전이었다.
군사적 성공을 거둔 태왕은 본격적으로 국가 발전 정책을 추진했다. 때마침 동아시아의 질서가 고구려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중국 강남지역에는 한족 정권인 동진이 근근이 버티고 있었다. 화북지방은 선비족 흉노계 티베트계 등 여러 종족의 국가가 서로 싸우고 있었다. 이른바 5호16국 시대의 대분열은 고구려의 약진에 적잖이 도움이 됐다.
경북 경주 노서동 신라고분에서 발견된 청동그릇. 밑바닥에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게다가 고구려는 지정학적으로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동아시아는 육지 중심의 세계가 아니다. 해양 면적이 더 넓고 광범위하다. 대부분의 교류와 무역은 물론이고 전쟁조차도 해양을 매개로 전개되는 횟수가 많았다. 지리적인 형태나 역사적인 성격으로 봐도 서양의 지중해와 유사점이 많아 ‘동아지중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구려는 동아지중해의 중핵(core)에 있다. 만주 일대와 한반도의 중북부 영토를 장악하고 서해와 동해 해양을 장악하면 ‘해륙통합형’ 국가를 만들 수 있다. 그러면 분열된 중국지역과 북방 초원을 해륙 양면으로 압박하면서 ‘동시 등거리 외교’를 추진할 수 있다. 또 백제 신라 가야 왜가 북중국과 직거래하는 것을 해양에서 통제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6개의 전략 요충지’를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랴오둥 반도 남단, 압록강 하구, 경기만, 두만강 하구와 연해주 남부, 그리고 동해 중부 해안이다.
태왕은 그런 꿈을 꿨다. “이 모든 게 성공한다면 동아시아 정치와 외교의 주도권을 확보하고 중심이 될 수 있다! 배후를 의식하지 않고 통일을 이룰 수 있다. 새로운 자원을 확보하고 사방으로 뻗은 교통망 허브에서 무역 국가를 지향할 수 있다.”
복잡한 국제관계의 핵심을 일찌감치 파악한 광개토태왕. 그는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관점과 국제관계라는 ‘큰 게임(great game)’의 틀에서 정책을 수립했던 우리 역사의 위대한 왕이었다.
윤명철 교수/동국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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