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동아일보 2014-02-04일자]
장수왕은 초기에는 산업을 발전시키고, 무역을 활발하게 하며 불교를 수용하는 등 내부 안정에 주력했다. 바야흐로 즉위 15년째가 되던 해 그는 토착세력들의 반발과 실패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이는 당시 급변하는 국제질서와 큰 연관이 있다.
중국의 화북 지방은 선비족인 북위로 통일되었고, 양쯔 강 하류의 강남 지방에는 한족의 송나라가 건국됐다. 소위 남북 분단 시대에 돌입한 것이다. 북방 초원에서는 몽골족의 일파인 유연이 유목국가를 세웠다. 유연은 424년 기병 6만 명을 동원하여 북위를 공격했다. 남쪽에서는 백제가 반격을 노리고 있었다. 신라는 고구려 지배에서 벗어나려 했다. 가야와 왜(倭)도 발언권을 높이고 있었다. 한마디로 당시 동아시아는 4개 강대국을 중심으로 중소 국가들이 새판을 짜는 전환기였던 것이었다. 만약 장수왕이 해양력을 더 강화시킨다면 동아 지중해의 중핵국가가 될 수 있었다.
그는 평양 천도를 새 정책의 핵심과제로 선택했다. 평양은 내륙에 있지만 대동강 하구(남포항)를 통해서 황해와 이어진 훌륭한 항구도시이다. 1866년에는 미국 상선인 제너럴셔먼호가 들어왔다가 공격을 받고 전소된 일도 있었다. 황해의 해상권을 확보하고, 해양과 대륙으로 이어진 해륙 교통망을 발달시키는 데 유리한 거점이다. 국내성이 갖지 못한 장점이기도 했다.
장수왕은 이 점을 간파했고, 평양을 중심으로 등거리 외교망을 구축하였다. 북위와는 황해북부항로로 긴밀하게 외교관계를 맺고 무역도 활발하게 하였다. 동시에 송나라와의 전략적 교류도 잊지 않았다. 439년 장수왕은 송나라에 전략물자인 군마 800필을 보낸다. 대규모의 선단이 황해를 1000여 km 항해해 난징까지 항해한 것이다. 479년에는 호시(화살) 석궁 등 무기를 수출하기도 했다.
장수왕은 유연과 송나라를 연결하면서 중간의 북위를 포위하고 압박하는 조정자 역할도 했다. 우리 민족 사이에는 적극적인 정책을 취했다. 백제 및 왜가 중국 지역과 교류하는 것을 해상에서 봉쇄하고, 신라 등이 중국지역과 외교관계를 맺는 일에 개입하였다.
평양 지역은 물류 거점(허브)과 국제문화의 교차점 역할도 할 수 있었다. 남포항을 출항한 선단들은 여러 나라와 무역을 했다. 동남아시아와도 간접무역을 했다. 일본열도, 제주도와도 무역을 했다.
평양은 군사적으로도 유리했다. 고구려는 수도를 몇 번이나 함락당했다. 평양은 주력전선인 북방과 거리가 멀고, 해안으로부터도 멀어서 방어할 공간적·시간적 여유가 있다. 한반도 통일전쟁에서도 유리했다. 백제와 신라, 가야를 압박하고, 유사시 신속하게 대응체제를 갖출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 장수왕은 475년에 한강을 넘어 백제 수도 한성을 점령했고, 충청 북부에서 소백산맥의 이남을 거쳐 동해 남부까지 영토로 삼았다. 평양은 현실적인 이익과 함께 통일을 추진하는 명분을 얻는 데도 필요했다.
‘삼국사기’ 동천왕 21년 조에는 ‘선인 왕검의 터(仙人王儉之宅)’라는 문장이 있다. 평양 지역을 고조선(원조선)의 수도 또는 수도에 버금가는 곳으로 인식한 것이다. 이 지역에서는 고조선의 수많은 고인돌과 유적이 발견됐다. 핵심 도시였다는 증거다. 평양에 도읍을 정하는 것은 고조선 계승을 표방하는 데 적절한 조치였다. 또한 우리 민족의 통일을 위해 꼭 필요했다. 광개토대왕도 전쟁을 치르는 와중인 393년에 평양 지역에다 9개의 큰 사찰을 지었다.
결과적으로 평양 천도는 남진정책의 표출이며 만주를 상실하게 된 원인이라는 평가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논쟁이 많지만 확실한 것은 고구려에 평양은 정치 물류 문화 등 국가시스템의 중핵이란 점이었다. 장수왕은 평양 천도 후 동아지중해 중핵조정 역할을 효율적으로 구현하면서, 다음 단계로 통일을 위한 정책들을 펴기 시작했다.
다음 회에는 장수왕의 통일정책을 민족 지역 문화 역사의 관점에서 살펴봅니다.
윤명철 교수
중국 지린 성 지안 현에서 발견된 통구 12호분의 벽화. 장수왕 때 만들어졌다.
철제품으로 무장한 개마무사 벽화의 모사도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윤명철 교수
광개토대왕(태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에게는 두 개의 시대적 과제가 있었다. 하나는 강대국의 완성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한반도와 만주 일대의 종족과 다양한 문화를 통일하는 일이었다. 장수왕은 초기에는 산업을 발전시키고, 무역을 활발하게 하며 불교를 수용하는 등 내부 안정에 주력했다. 바야흐로 즉위 15년째가 되던 해 그는 토착세력들의 반발과 실패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이는 당시 급변하는 국제질서와 큰 연관이 있다.
중국의 화북 지방은 선비족인 북위로 통일되었고, 양쯔 강 하류의 강남 지방에는 한족의 송나라가 건국됐다. 소위 남북 분단 시대에 돌입한 것이다. 북방 초원에서는 몽골족의 일파인 유연이 유목국가를 세웠다. 유연은 424년 기병 6만 명을 동원하여 북위를 공격했다. 남쪽에서는 백제가 반격을 노리고 있었다. 신라는 고구려 지배에서 벗어나려 했다. 가야와 왜(倭)도 발언권을 높이고 있었다. 한마디로 당시 동아시아는 4개 강대국을 중심으로 중소 국가들이 새판을 짜는 전환기였던 것이었다. 만약 장수왕이 해양력을 더 강화시킨다면 동아 지중해의 중핵국가가 될 수 있었다.
그는 평양 천도를 새 정책의 핵심과제로 선택했다. 평양은 내륙에 있지만 대동강 하구(남포항)를 통해서 황해와 이어진 훌륭한 항구도시이다. 1866년에는 미국 상선인 제너럴셔먼호가 들어왔다가 공격을 받고 전소된 일도 있었다. 황해의 해상권을 확보하고, 해양과 대륙으로 이어진 해륙 교통망을 발달시키는 데 유리한 거점이다. 국내성이 갖지 못한 장점이기도 했다.
장수왕은 이 점을 간파했고, 평양을 중심으로 등거리 외교망을 구축하였다. 북위와는 황해북부항로로 긴밀하게 외교관계를 맺고 무역도 활발하게 하였다. 동시에 송나라와의 전략적 교류도 잊지 않았다. 439년 장수왕은 송나라에 전략물자인 군마 800필을 보낸다. 대규모의 선단이 황해를 1000여 km 항해해 난징까지 항해한 것이다. 479년에는 호시(화살) 석궁 등 무기를 수출하기도 했다.
장수왕은 유연과 송나라를 연결하면서 중간의 북위를 포위하고 압박하는 조정자 역할도 했다. 우리 민족 사이에는 적극적인 정책을 취했다. 백제 및 왜가 중국 지역과 교류하는 것을 해상에서 봉쇄하고, 신라 등이 중국지역과 외교관계를 맺는 일에 개입하였다.
평양 지역은 물류 거점(허브)과 국제문화의 교차점 역할도 할 수 있었다. 남포항을 출항한 선단들은 여러 나라와 무역을 했다. 동남아시아와도 간접무역을 했다. 일본열도, 제주도와도 무역을 했다.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뒤 궁성(안학궁)을 지었다. 안학궁을 보위하고 있는
대성산성의 남문이다. ‘조선 유적유물도감’에 수록돼 있다. 민족문화출판사 제공
‘삼국사기’ 동천왕 21년 조에는 ‘선인 왕검의 터(仙人王儉之宅)’라는 문장이 있다. 평양 지역을 고조선(원조선)의 수도 또는 수도에 버금가는 곳으로 인식한 것이다. 이 지역에서는 고조선의 수많은 고인돌과 유적이 발견됐다. 핵심 도시였다는 증거다. 평양에 도읍을 정하는 것은 고조선 계승을 표방하는 데 적절한 조치였다. 또한 우리 민족의 통일을 위해 꼭 필요했다. 광개토대왕도 전쟁을 치르는 와중인 393년에 평양 지역에다 9개의 큰 사찰을 지었다.
결과적으로 평양 천도는 남진정책의 표출이며 만주를 상실하게 된 원인이라는 평가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논쟁이 많지만 확실한 것은 고구려에 평양은 정치 물류 문화 등 국가시스템의 중핵이란 점이었다. 장수왕은 평양 천도 후 동아지중해 중핵조정 역할을 효율적으로 구현하면서, 다음 단계로 통일을 위한 정책들을 펴기 시작했다.
다음 회에는 장수왕의 통일정책을 민족 지역 문화 역사의 관점에서 살펴봅니다.
윤명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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