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리더십의 경연장이다. 무능·무모한 리더십은 재앙을 부른다. 제1차 세계대전 카포레토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은 집단 패주했다. 최고사령관 루이지 카도르나의 지도력 실패로 인한 군대 붕괴다. 줄리안 알프스 전선에서다. 미국인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그 전선에 나갔다. 그는 전쟁의 비극과 인간성의 야만을 포착한다. 그것을 『무기여 잘 있거라』에 옮겼다. 올해가 1차대전 100주년. 소설 속 현장을 찾아갔다. 지금은 대부분 슬로베니아 땅.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제1차 세계대전에 나갔다. 이탈리아군 앰뷸런스 운전병으로 참전했다. 그는 자원입대한 미국인이다. 줄리안 알프스(Julian Alps) 전선에 배치됐다. 오스트리아와의 전쟁터다.
헤밍웨이는 전선 체험을 소설로 적었다. 『무기여 잘 있거라(A Farewell to Arms)』-. 그는 전쟁의 비극과 인간성의 야만을 포착한다.
산 아래 소차(Soca)강이 흐른다. 이탈리아 말로 이손조(Isonzo). 한 세기 전 그 산과 계곡은 격전지다. 지금은 슬로베니아와 이탈리아 국경지역. 이손조 전투의 상징은 카포레토(Caporetto)다. 카포레토 전투에서 이탈리아 군대는 붕괴됐다(29만 포로). 줄리안 알프스 전쟁은 잊혀졌다.
카포레토 참패는 리더십 실패의 결집이다. 그런 해체는 평화 때도 있다. 세월호 참사는 조직 붕괴다.
코바리드 1차 세계대전 박물관과 박보균 대기자.
카포레토는 현재 슬로베니아 땅. 코바리드(Kobarid)라고 부른다. 수도 류블랴나(Ljubljana)에서 서쪽 끝 115㎞ 떨어졌다. 슬로베니아는 1991년 옛 유고슬라비아에서 독립했다. 나는 올해 그 현장에 갔다. 2014년은 1차대전 100주년. 잊어버린 전쟁을 찾아서다. 『무기여 잘 있거라』는 추적의 단서다.
길은 거칠어진다. 알프스 산줄기다. 산 옆구리를 쳐낸 좁은 2차로. 아래는 가파른 계곡. 에메랄드 색깔의 소차(이손조)강이 보인다. 유럽 강들은 작다. 한강은 바다 같다. “강물은 맑고 얕으며 흐름이 빨랐다. 하늘색 물빛, 산 정상에 눈이 보인다. 『무기여 잘 있거라 구절』”-. 미려(美麗)한 수채화다.
헤밍웨이가 묘사한 풍광은 살아 있다. 작은 마을(인구 1100명)이 나온다. 코바리드다. 『무기여…』의 주인공은 야전병원 중위 프레더릭 헨리(Frederic Henry)다. 미국인 수송장교 헨리는 기억한다. “종탑(鐘塔)이 있는 골짜기 속 희고 작은 마을”-. 그 구절대로 재건됐다.
코바리드 전쟁박물관은 관광 명소다. 큐레이터는 설명한다.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간 전쟁은 조연으로 취급된다. 하지만 처절함은 서부전선(프랑스·영국 대 독일)과 다를 바 없다. 여기 슬로베니아 땅이 기억의 장소다.”
이탈리아는 독일·오스트리아와 삼국동맹국이었다. 개전 직후 동맹에서 탈퇴했다.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 땅에 야심을 가졌다. 영국은 그 갈증을 부추겼다. 이탈리아는 합스부르크(Habsburg)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1915년 5월 24일, 1차대전 시작 9개월 뒤다. 영국·프랑스 편이 됐다.
첫 전투에서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군을 물리쳤다. 정예 산악부대 알피니(Alpini)는 크른(KRN·2244m)산을 점령했다. 접경지 카포레토(코바리드)를 차지했다. 박물관에 양군 사진이 함께 전시돼 있다. 추모 십자석도 적과 동지를 나누지 않는다. 요제 셰르베치(Jo<017E>e <0160>erbec) 관장은 “군복 견장 5각별은 이탈리아(프랑스제 철모), 오스트리아는 6각별(베른도르프 철모)”이라고 구별해 준다. 무기, 포탄, 철모, 사진, 지도, 군복들이 짜임새 있게 진열돼 있다. 박물관은 아담한 3층 건물.
코바리드 길가에 녹슨 대포가 있다. 이탈리아군 149mm 곡사포. 대포는 나의 기억장치다. 대포 뒤쪽 멀리 알프스 산맥이 펼쳐진다. 나는 100년 전 전투 속으로 들어간다. 국경은 길었다. 중남부 유럽의 유선형 ㄱ자(600km). 주요 전장 두 군데가 형성됐다. 이탈리아의 북쪽 트렌티노(Trentino)와 동쪽 줄리안 알프스의 이손조 계곡이다. 이탈리아군은 이손조 전선(100km)에 집중했다. 최고사령관 루이지 카도르나의 롤 모델은 나폴레옹이다. 알프스 국경 돌파→슬로베니아 평야 공략→오스트리아 빈 압박 전략이다. 장교들은 65세 지휘관의 역량을 의심했다. “우리 군에 나폴레옹이 있기를 바랐지만, 카도르나는 살찌고 부유했다. 『무기여…』”-.
줄리안 알프스(3000m 이하)는 스위스 쪽 알프스보다 낮다. 산세는 그쪽보다 험악하다. 양쪽 군대는 산 암벽에 참호를 팠다. 겨울엔 폭설과 혹한, 눈사태에 시달렸다. 아이젠, 눈신발, 삽, 고글이 눈에 띈다. 노새 편자도 미끄럼 방지용이다. 케이블카는 대포, 탄약, 식량, 부상자를 산꼭대기로 나른다. “서부전선 흙에 떨어지는 포탄과 달랐다. 알프스의 날카로운 돌 파편은 치명상을 입혔다.”(『1차 세계대전』 R.G. 그란트 지음). 양쪽 모두 상대방을 증오했다.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의 동맹 탈퇴를 배신으로 여겼다.
전시실에 모형 산악참호가 있다. 밀랍인형 병사가 편지를 쓴다. 검독수리 깃털 모자의 알피니 부대원이다. “산악 진지에서 비참한 공포를 경험했다. 동료와 적의 시체 사이에서 쪼그리고 지냈다. 물은 없다. 악취가 코를 찌른다.” 그 일기는 산악 전투의 고달픔과 악몽을 전달한다. 박물관 2층에 헤밍웨이 사진이 걸렸다. 하얀 턱수염은 어색하다. 부상으로 군병원 침대에 누운 사진도 있다. 『무기여…』시절은 조각 같은 꽃미남이다.
이손조(소차) 전투는 이탈리아가 주도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방어다. 다른 두 곳(러시아와 동부전선, 세르비아와 발칸전선)으로의 전력 분산 때문이다. 전투는 석 달에 한 번씩 있었다. 한 번 전투(보름쯤)에 이탈리아군 사상자는 2만~3만 명. 참상이었다. 하지만 의미 있는 전과는 드물었다. 영토 점령은 더뎠고 찔끔댔다. 교착상태는 길었다. 1917년 8월(11차 이손조 전투)에 이탈리아는 바인시차(Bainsizza) 고원을 확보했다. 희생은 컸다(사상자 17만 명). 승부의 결정타를 날리지 못했다.
나는 코바리드에서 20km 위쪽 보베치(Bovec)로 갔다. 디즈니 영화 ‘나니아 연대기- 캐스피언 왕자’ 촬영 장소다. 관광 안내문은 “소차강의 불가사의한 청록색 물빛과 트리글라브(Triglav) 국립공원은 동화 속 환상을 연출”이라고 씌어 있다. 풍광은 숨을 막히게 한다. 100년 전쯤 그 협곡과 강은 피로 물들었다. 죽음은 넘쳐났다. 전쟁은 자연을 배반한다.
산길을 오르니 거대한 진지가 나온다. 클루제 요새, 성벽처럼 버티고 있다. 오스트리아군 유적. 위쪽 헤르만(Hermann) 진지는 수풀 속에 방치돼 있다. 참호 돌 벽에 탄흔이 무수하다. 나는 돌 부스러기를 한 움큼 쥐었다. 냄새를 맡았다. “포탄이 떨어진 곳에는 가루가 된 부싯돌 냄새가 났다. 『무기여… 구절』”-.
왼쪽부터 베르살리에리부대 수탉 깃털모자, 알프스전투용 눈신발, 독일군 최고훈장 푸르 르 메리트.
카도르나는 ‘단조로운 정면 돌파’를 고집했다. 그의 전략적 상상력은 빈곤했다. ‘작은 실적, 큰 피해’는 반복됐다. 전쟁 초기 병사들은 용감했다. 그 사기는 꺼져 갔다. “엄청난 병력이 소모되고 있다. 바인시차를 점령해도 오스트리아 쪽은 산들로 계속 막혀 있다. 『무기여…』”-. 오스트리아군 사상자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오스트리아 방어망은 약한 듯 견고했다. 전선은 암울해졌다.
11 차 이손조 전투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노쇠함도 드러냈다. 오스트리아 황제 카를 1세는 지원을 요청했다. 독일 카이저(빌헬름 2세)는 응답했다. 그 무렵 러시아는 볼셰비키혁명으로 시끄러웠다. 동부전선의 변화는 재배치를 가능하게 했다. 독일군은 중부전선에 처음 뛰어들었다. 합동 14군(독일 7개+오스트리아 8개 사단)이 신설됐다. 전력은 외형상 비슷했다. 이탈리아군은 34개(40만 명) 사단과 포 2485문을 가졌다. 반대편(독+오스트리아·헝가리)은 35개(35만 명) 사단에 포 2430문. 이제부터 리더십 역량과 전략적 상상력, 전쟁 의지가 승패를 가른다. 헤밍웨이의 감수성은 정밀해진다.
“독일군, 그 말은 섬뜩(frightened)하게 만드는 무엇이 있었다. 『무기여…』”-. 명성은 힘이다. 두려움은 전염병처럼 퍼졌다. 독-오 합동군은 카포레토(코바리드)에 집중했다. 그곳 이탈리아 방어는 취약했다. 12차 이손조 전투는 카포레토 전투로 불린다. 오스트리아군은 앙갚음의 기회로 삼았다.
왼쪽부터 이탈리아군 운전병 헤밍웨이, 이탈리아군 최고사령관 카도르나, 독일군 중위 롬멜.
1917년 10월 24일 새벽 2시. 독-오 합동군은 공격을 개시했다. 안개 짙은 어둠 속에서 독가스탄, 연막탄을 쏘았다. 이탈리아 군대는 혼란에 빠졌다. 방독면은 엉성했다. 아침 6시30분 대포가 불을 뿜었다. 이어 보병의 기습공격. 좁고 거친 계곡으로 진입했다. 독일군 ‘침투(infiltration) 전술’은 주효했다. 독일 장군 후티어(Hutier) 전술. 후티어의 작은 사진이 큰 전시실을 압도한다.
카포레토 쪽이 뚫렸다. 이탈리아 군은 겁을 먹는다. 지리멸렬했다. 총과 대포를 버린다. 진지를 포기했다. 무리지어 도망친다. 공황(恐慌) 속 군대 붕괴다. 소설 『무기여…』는 영화(록 허드슨, 제니퍼 존스 주연)로 제작됐다. 영화 속 헨리 중위도 후퇴한다. 앰뷸런스 트럭은 진흙길에 빠졌다. 패퇴의 길은 고달프다. 군인과 민간인이 섞인다. 살기 위해 상대방의 목을 조른다. 철조망 위에 걸린 시신은 섬뜩하다. 패주는 계급과 명령, 복종을 깬다.
① 줄리안 알프스와 소차(이손조)강. 산 정상 흰 눈과 에메랄드 물빛은 환상의 수채화. 한 세기 전에 계곡은 피로 물들었다. ② 전선을 시찰하는 카도르나(오른쪽 셋째). 소통 없는 엄격한 규율로 통솔했다. ③ 코바리드 박물관 2층 헤밍웨이 코너.
“카도르나는 집단(en masse) 투항과 패주(rout)를 질서정연한 후퇴로 바꾸려 했다. 낙오 장교들을 즉결처형했다.”(R. G. 그란트의 『1차 세계대전』). 극단적 수단도 항전 의지를 되살리지 못했다. 영웅적 저항은 없다. 장렬한 산화도 없다. 수탉 깃털 부대 베르살리에리(Bersaglieri)의 돌격은 사라졌다. ‘독일, 오스트리아 만세(Evviva)’를 외쳤다. 독-오 군의 병참선이 길어졌다. 공세는 피아베(Piave)강에서 멈췄다. 이탈리아는 사령부 주둔지 우디네(Udine)도 빼앗겼다. 후퇴 거리는 150km(베니스 북쪽 30km 지점).
유럽인 관광객 20여 명이 카도르나 사진을 살핀다. 1차대전 100주년 기념 관광단이다. 가이드가 전쟁사전문가 존 맥도널드(John Macdonald)의 책을 읽어 준다. “카도르나는 공포로 통솔했다. 그는 참패의 책임을 부하에게 돌렸다. 군사적 파업으로 오도했다.”(『카포레토와 이손조 전선』). 관광객들이 쓴웃음을 짓는다.
1차대전 때 이탈리아 왕국(왼쪽 위)과 오스트리아제국 깃발(코바리드 박물관·왼쪽 아래), 무솔리니는 베르살리에리 부대에서 복무.
비슷한 사례가 떠오른다. 2차대전 때 프랑스군은 독일군 전격전에 무너졌다. 리더십 실패와 전쟁 의지 상실 때문이다. 베트남전에서 월남군은 집단 투항했다. 한국군 3군단은 중공군 기습에 패주했다(1951년 5월 현리 전투). 세월호 참사는 조직 해체다. 선박 지휘부는 패주했다. 구조와 수습의 리더십은 어설펐다.
나는 코바리드(카포레토) 마을 세인트 안소니(St. Anthony) 교회 납골당에 갔다. 이탈리아군 전사자(7014명) 유골이 보관돼 있다. 1차대전종전 후 코바리드는 이탈리아 땅이 됐다. 1938년 10월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는 납골당 봉헌식에 참석했다. 파시스트 독재자는 그곳을 애국심과 전우애로 치장했다.
납골당에 수학여행단이 왔다. 이탈리아 베로나(Verona) 중학생들이다. 인솔 교사는 “우리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들은 추모석 앞에 섰다. “이곳에서 용감하게 싸우다 쓰러진 당신들에게 경의를 표한다(ONORE A VOI CHE QUI CADESTE VALOROSAMENTE COMBATTENDO).”
무솔리니는 1915년 9월 이손조 전선에 나갔다. 그는 영향력 있는 저널리스트였다. 사병(32세, 하사로 승진)으로 징집됐다. “산속 참호에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련을 겪었다. 추위와 배고픔, 눈과 비, 진흙탕…”(무솔리니 자서전). 그는 수류탄 폭발사고로 중상을 입었다. 카포레토 전투 두 달 전쯤 전역했다.
나는 패배 이유를 물었다. 교사의 표정은 난감하다. 교사는 “이해할 수 없는 참패였다. 지도력 실패”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탈리아 군대 전통은 약하지 않다”고 했다. 로마제국, 베니스, 사르데냐 왕국을 들었다. 군사력은 무기와 병력, 리더십, 전쟁 의지를 합한다. 이탈리아의 총량은 부족했다. 무형적 요소(리더십+의지)가 미달했다. “이탈리아는 감당할 힘이 없다. 분에 넘치는 전쟁을 했다. 『무기여… 구절』”-. 어리석은 리더십은 나라 이미지를 망가뜨린다. 후유증은 컸다. “이탈리아 군대는 신망을 잃었다. 군사적 자질은 값싼 조롱거리(gibes)였다.”(존 키건 『1차대전사』)
1차대전은 서부전선 독일의 항복(1918년 11월)으로 끝났다. 이탈리아도 승전 4대국에 끼였다. 하지만 베르사유(Versailles)회담에서 발언권은 약했다. 영토 야심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약체와 무기력, 불명예의 평판은 오래갔다. 무솔리니의 2차대전 때도 회복되지 않았다.
줄리안 알프스 전쟁은 무모했다. 29개월간 이손조 전투(총12회)는 잔혹했다. 이탈리아군 사상자는 67만 명(포로 33만 명 제외)이다. 오스트리아군 41만 명. 박물관 블랙 룸은 전쟁의 끔찍함이다. 사진 속 병사의 코와 눈, 입은 심하게 일그러졌다. 총과 독가스탄의 상흔이다. 이손조는 서부전선의 베르됭이다.
존 쉰들러(John R. Schindler) 미 해군대학(NWC) 교수는 “쓸모없는(useless) 목표, 무의미한 전투로 희생은 엄청났다”고 했다(『이손조, 1차대전의 잊어진 희생』). 비극의 역사는 조명되지 않는다. 이탈리아는 참패를 부담스러워한다. 오스트리아는 사라진 제국 합스부르크의 유산으로 여긴다. 티토 집권 때 유고(현 슬로베니아)는 기억하지 않았다.(2차대전 뒤 코바리드는 유고 영토) 박물관 콘셉트는 화해와 평화다. 영광과 굴욕은 뒤로한다.
코바리드를 떠날 시간이다. 박물관 한쪽에서 알피니부대 찬송가가 흐른다. ‘스텔루티스 알피니스(Stelutis Alpinis)’. “내가 죽어 잠들어 있는 곳은 에델바이스 풀밭.”
슬로베니아 코바리드=글·사진 박보균 대기자
◆제1차 세계대전=1914년 6월 28일 세르비아계 청년 프린치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태자 부부를 암살한다. 사라예보 사건이다. 한 달 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한다. 유럽 판도는 삼국동맹(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 대(對) 삼국협상(프랑스-영국-러시아). 그것은 인계철선으로 작동한다. 암살 5주 만에 서로간 선전포고와 총동원령이 이어졌다. 그리고 4년4개월(1914년 7월 28일~1918년 11월 11일) 전쟁. 독일의 항복으로 끝났다. 이탈리아는 처음에 중립, 나중에 ‘협상’ 편에서 전쟁을 했다.
◆루이지 카도르나(Luigi Cadorna·1850~1928)=이탈리아 군 참모총장 겸 최고사령관. 장교 때부터 엄격한 군기와 거친 처벌로 유명했다. 전쟁 동안 장군만 217명을 경질. 그는 카포레토의 지휘 실패에다 즉결처형으로 비난받았다. 종전 후 집권자 무솔리니는 불명예 퇴역한 그를 원수(Maresciallo)로 승진시켰다.
◆1차대전 100주년(2014년) 기념=올해 유럽에서 다양한 추모행사를 하고 있다. 유럽 정상들은 격전지에 모인다. 전쟁의 비극을 기억하며 평화의 소중함을 다지고 있다. 전적지와 박물관을 찾는 관광·견학도 활기차다.
◆프랑스 베르됭(Verdun)전투=1차대전 서부전선 베르됭에서 독일과 프랑스군의 공방전(1916년 2~10월). 양군 희생자 63만여 명의 살육전이다. 이손조 전투는 알프스 산맥의 베르됭으로 불린다.
사진 설명
① 코바리드(카포레토) 마을 도로 옆에 있는 한 세기 전 이탈리아군의 149?곡사포. 녹슨 대포는 전쟁의 격렬함을 기억한다. 뒤쪽에 눈 덮인 줄리안 알프스 산.
② 이탈리아군 납골당 교회와 험악한 줄리안 알프스 산세. 코바리드의 상징 풍광.
③ 카포레토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은 집단 후퇴했다. 전쟁 의지를 상실한 군대의 붕괴 모습.
④ 모형 알프스 산악 참호, 밀랍인형은 이탈리아 정예 알피니 부대원.
⑤ 코바리드 박물관은 이탈리아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인을 함께 기억한다.
⑥ 소차강 협곡 위에 남아 있는 오스트리아군의 거대한 클루제 요새.
⑦ 산악 케이블카는 무기, 식량, 부상자를 운반.
박보균 기자/중앙일보